Travis - Writing to reach you
두 해 전, 트래비스의 「Writing to reach you」에 관한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뒤집히고 어지럽고'라는 제목이었다. 본의 아니게 옛 애인을 그리워하며 쓴 걸로 읽혀 M에게 상처를 입히고 덩달아 이 노래를 그녀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워버리게 만드는 몹쓸 글이 되어버렸다. 트래비스가 이 곡을 쓰게 된 동기가 두 가지임을 생각한다면 너에게 닿으려 쓴다는 제목에서도 이중적인 의미를 읽을 수 있겠고, 때문에 오해가 벌어질 만도 했다. 이 곡의 플레이 타임만큼이나 짧은 시간 동안 휘갈겨 쓰기도 했으니까.
널리 알려져 있듯 이 곡의 모티프는 오아시스의 「Wonderwall」이었다. 1995년, 영국의 라디오에선 온통 오아시스의 「Wonderwall」만 나오고 있었고, 트래비스의 보컬 프랜시스 힐리는 그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코드를 그대로 가져와 「Writing to reach you」를 썼다. 그러고는 팬심이 과한 데 마음이 찔려 이런 가사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라디오에선 같은 곡만 반복해서 흘러나와. 그런데 도대체 Wonderwall이 뭐야?” 그러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두 번째 모티프는 프란츠 카프카가 약혼녀였던 펠리체 바우어에게 쓴 편지였다. 카프카는 500통이 넘는 편지에 펠리체를 향한 사랑과 그 이상으로 불안정한 작가 자신의 정신세계, 그리고 작품의 집필 노트를 담았다. 마침 「Wonderwall」이 죽어라 초단파를 타고 있을 때 힐리가 그의 서간집을 읽고 있었고, 거기서 받은 영감으로 「Writing to reach you」의 가사를 써내려 갔다. 이 곡이 헤어진 이에게 편지를 쓰지만 결국 전달하지는 못하는 이의 심정을 담게 된 연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내가 주목한 건 첫 번째 모티프였다. 너에게 닿으려 쓴다는 제목이 선망의 대상에게 바치는 오마주라는 점에, 자신의 영웅에게 툭 하고 던진 한 마디 농담 같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 당신처럼 쓰고 싶어요. 당신처럼 쓰진 못해도, 당신처럼 쓸 생각은 없어도, 어쨌든 당신은 나로 하여금 뭔가를 쓰게 만들었어요.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뭔가를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몰려봤을 심정이고, 나도 그 심정 충분히 공감하니까.
두 해 전 글을 나는 이렇게 시작했다.
트래비스의 「라이팅 투 리치 유」를 한참 듣곤 했다. 지금 책상머리나 식탁이나 베란다에 기대어 글을 쓰고 있는 모두를 위한 주제곡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 곡은 조금 음울하기도 하고 자조적이기도 하다. 애절하다는 표현도 좋겠지만, 조금 망설여진다. 신경의 중심이 상대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우울은 너를 향한 그리움보다는 너에게 닿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력함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두 해 전 글을 나는 이렇게 살짝 바꾸고자 한다.
다시 트래비스의 「라이팅 투 리치 유」를 한참이나 듣고 있다. 이 곡은 여전히 지금 책상이나 식탁 머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모두의 주제곡이다. 음울하고 자조적이지만, 애절하다는 표현까지는 망설여진다. 결국 내가 닿을 수 없는 너보다는 너에게 닿지 못하는 내가 더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우울은 너를 향한 그리움보다는 너에게 닿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력함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부언하고자 한다.
너는 내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지만 정작 누구인지는 모르는 독자다. (트래비스, 당신들도 말이야.)
자기가 쓴 글에 부언하는 것은 적잖이 부끄러운 짓이지만, 어쨌든 벌어진 일은 내가 우려하던 일이었다. 너에게 닿지 못해서 죽겠다는 노래에 관한 글이 결국 오해를 불러일으켰으니, 정말 나의 글이란 너와 너의 복수형複數形에게 제대로 닿지 못하는 수준인가 보다. 누구나 똑같은 공정을 거쳐 텍스트를 이해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과연 그게 글인 건가 보다. 마침 이 노래의 가사에도 그런 문장이 있다. “네게 너에 관해 알려주고 싶지만, 그건 네가 아닐 거야.”
본래의 의도를 문장에 담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 의도가 읽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길 바라는 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사르트르는 창조는 오직 읽기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고 했다. 작가는 그저 쓸 따름이고, 거기서 의미를 발견하고 확장하여 작가가 작품을 써낸 순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건 독자의 일이라는 말이다. 아직 난 그런 단계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무어라 덧붙일 재간은 없지만, 어쨌든 사르트르가 말하고자 한 바의 뉘앙스까지는 감지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하여 이제 내가 할 일은 무엇이 되었든 자명한 문장을 쓰려는 노력이겠다. 때로는 완벽한 형식이 중요할 것이다. 그보다 더 자주, 읽는 이의 의식을 문장이 관통해 순식간에 세상과 연결되는 결정적인 수사가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종합 패키지로서의 글에 할 수 있는 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뒤집히고 어지러웠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런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Writing to reach you」를 그렇게 반복해서 듣게 만들었던 가사를 꺼내 보자. “my inside is outside, my right side’s on the left side. ‘Cause I’m writing to reach you.” 나는 이 두 문장에 할 수 있는 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감탄했다. 힐리가 노엘 겔러거의 코드를 가져오고 싶었듯, 나도 힐리의 가사를 가져오고 싶었다. 그래서 가사 전체를 번역해 보기도 했으나 항상 이 부분만 성에 차지 않았다. 두 해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속이 뒤집히고 좌우가 혼동될 지경이라는 심정을 어떻게 이렇게 간단한 표현으로 운율까지 완벽하게 쓸 수 있었을까? 나는 있는 문장을 한국어로 바꾸지도 못하는데? 속이 뒤집힌다, 라고 옮길 수야 있겠지만 운도 맞지 않는 속이 뒤집힌다는 말은 어떻게 뒤집어 봐도 성에 차지 않았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을 「속 뒤집힌 친구들」따위로 번역하는 꼴이었다. 그랬다면 불을 보듯 흥행에 참패했을 것이다.
나는 두 해 전 글을 이렇게 맺음 했다.
표현하고 싶은 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때, 몹시 고달프다. 속이 뒤집히고, 내 심장은 어느 쪽 가슴에서 뛰고 방금 뻗은 팔은 왼팔인지 오른팔인지 모를 일이 된다. 이런 혼란을 my inside is outside라든지 my right side’s on the left side이라는 단순한 문장으로 써낸 데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뉘앙스를 가장 적절하게, 또는 가장 시적인 말로 옮길 수 없다는 데 좌절할 수밖에 없다. 다시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 어지러운 것 같은 상태가 반복된다. 그래서 이 곡을 듣고 또 듣고, 그렇게 반복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고치지 않으려 한다. 뒤집히고 어지러운 상태는 여태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