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2
이중섭은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한 지 약 2년 후 평안남도의 매우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과는 11살 누나와는 10살 차이가 나는 이중섭은 집안의 늦둥이 막내로 많은 예쁨을 받고 자랐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에 장남 역할을 할 형도 있었고, 그 시대에 이야기하던 살림 밑천이라는 누나도 있었기에 중섭의 삶은 조금 편안했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에게도 형과 누나가 있었기에 중섭은 큰 기대 없이 마냥 예쁘고 귀여운 막내아들이었겠죠.
중섭이 4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이후 외갓집에서 자랐습니다. 외할아버지가 평양에서도 손꼽히는 아주 부자였다고 합니다. 외갓집이 있는 평양으로 옮겨간 중섭은 다행히 할아버지의 사업이 일제 강점기에도 번창하여 시대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유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중섭의 그림이 티 없이 맑은 아이의 그림 같은 것은 어두운 시대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고 부족함 없는 유년기를 보내서였을까요?
중섭은 일찍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는데요. 간식을 주어도 일단 그림을 그린 후에 먹었다고 하니 그림을 그리며 큰 즐거움을 느꼈던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서울에서 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내정적이고 조용한 중섭은 사색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좋아했고, 학과 공부보다는 점점 더 그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평양고등보통학교 진학에 실패한 중섭은 오산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진학 실패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운명이었는지 오산학교에 들어가 당시 미술담당 교사였던 임용련을 만나게 됩니다. 임용련은 고등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가 중국으로 탈출하였고, 중국인을 가장하여 중국여권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미술학교,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그 당시 흔치 않던 서양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굉장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지요. 예일대학 장학금으로 파리에서 유학을 하던 중 역시 유학 중이던 서양화가 백남순을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부부는 어지러운 한국의 상황은 잊은 채 파리에서 우아하게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도 되었을 텐데요. 어떠한 사명감 때문이었는지 한국으로 들어와 한국학생들을 위한 미술교육에 힘쓰고자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합니다.
임용련의 영향을 받아서일까요? 이후 중섭의 그림에는 민족정신을 느낄 수 있는 그림들이 많이 있지요. 특히 임용련은 실제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한 드로잉의 중요성을 중섭에게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중섭의 그림에는 소, 닭, 꽃게, 아이들 등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상의 드로잉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죠.
임용련의 가르침 대로 이중섭은 대상에 대한 세심한 묘사를 위해 많이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임용련은 연필화를 단순한 드로잉이 아닌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미국의 한 고미술상에서 발견된 임용련의 십자가의 상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연필화에 진심이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중섭의 <세 사람> 맨 앞에 누워있는 아이의 손을 보면 손을 살짝 오므리고 있는 모양의 표현이 실제 손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세부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이중섭은 195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교외에 있던 데이코쿠 미술학교(제국미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중퇴한 후 분카학원(문화학원)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분카학원은 당시 경직되어 있던 일본 사회에서 최초로 남녀평등교육을 실시한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였습니다.
그곳에서 이중섭은 평생의 운명 마사코를 만나게 됩니다. 훗날 마사코의 인터뷰를 보면 알려진 것과 달리 마사코의 부모님의 이중섭과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으셨고, 피난길에 오르기 전까지 원산에 살며 윤택한 생활을 해왔다고 합니다. 두 아들이 태어나고 경제적으로도 편안하게 생활을 하며 프랑스 유학도 생각했었지만 1950년 12월 중공군이 내려오면서 흥남철수에 동행하여 부산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전까지 그렸던 그림 대부분을 원산에 남아계신 어머니에게 맡기고 와 현재는 그 그림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중섭의 초기 그림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에겐 참 아쉬운 일입니다.
1950년 12월 19일 흥남 철수 당시 상륙함에 오르기 위해 늘어선 피난민들
이전까지는 가족의 테두리에서 그나마도 편안한 삶을 살아왔던 중섭은 이제 아내인 마사코 그리고 두 아이와 함께 피난 생활을 버텨내야 했습니다. 사진으로나마 그날의 혼돈을 예상해 볼 수 있는데요. 이런 혼란 속에도 가장 먼저 팔레트와 물감을 챙겼던 이중섭에게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가기는 것은 쉽지 않았겠죠.
부산에 도착한 중섭은 생계를 위해 노동시장에 나가 험한 일들을 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애원해서 일을 얻어내야 하는 상황이 중섭에겐 어려웠겠죠. 결국 마사코가 재봉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 보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춥고 힘든 피난 생활을 보내야 했습니다. 화가 황염수의 아내 남경숙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중섭이 정말 무능하고 나쁜 남편이었고, 아내를 그렇게 고생시킬 수는 없었다고 분노하며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적인 화가였지만 전쟁 중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에는 영 재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춥고 어려운 겨울을 보내던 중 제주도가 상황이 좀 낫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주도로 옮겨가 서귀포에서 11개월을 머뭅니다. 배급으로는 살아가기가 빠듯하여 게를 잡아먹으며 어렵게 지냈지만 가족과 함께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로 꼽는 시기입니다. 당시 게와 물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먹은 것이 미안해 그림에 그렸다는 이야기는 이중섭의 천진하고 여린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일화입니다.
서귀포 우리 집. 이중섭.
이중섭의 제주에서의 생활은 그가 추억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가족이 모두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작은 단칸방에서 수입이 없이 살긴 쉽지 않았겠죠. 서귀포 우리 집이라는 은지화를 보면 조금은 피난 생활의 배고프고 힘든 생활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아내와 아이들의 몸도 점점 약해지고 있어서 이중섭의 걱정은 더욱 컷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현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요? 이중섭의 다른 그림들에 등장하는 제주도는 환상의 나라 같기도 합니다.
서귀포의 환상이라는 그림에서는 은지화 속 사람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편안해 보이고 평온한 느낌입니다. 그림 속에서 서귀포는 따뜻하고 커다란 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풍요로운 장소입니다. 하지만 이중섭이 추억했던 가족의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마사코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고 마사코와 아이들은 일본으로 향하게 됩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국교 단절상태였기 때문에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갈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오랜 피난생활로 몸이 약해진 마사코와 아이들을 위해 이중섭은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주어야만 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거의 매일 편지와 엽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엽서 속 가족을 태운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중섭의 모습이 평화로우면서도 신묘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이 시기 중섭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와 엽서에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녹아있습니다. 마음 같아선 가족과 함께 살며 일상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을 그림을 그리며 달래 왔던 것 같습니다. 지금 내 옆엔 없지만 언젠간 만날 그날을 생각하며 현실적인 것 같지만 한편으론 비현실적인 것 같은 신묘한 느낌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편지는 2022년 이중섭미술관의 신소장품인데요. 1952년경 부산에서 일본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끝부분에 ‘제주도의 게에 대한 추억이오. 태현이와 태성이에게 보여주시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일본에 있는 그리운 아이들을 그림으로라도 추억해 보는 아버지의 그리운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이중섭이 그림을 그리는 목표는 단 하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족과 함께하고자 하는 의지가 중섭이 그림에 집중하게 했습니다. 이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이중섭의 소 그림들이 나오게 되죠. 가족들이 일본으로 간 후 일주일 정도 짧은 재회를 한 후 다시 만날 그날을 생각하며 그림을 계속 그렸다고 합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 그것이 이중섭을 살게 하는, 그림을 그리게 하는 원동력이었죠. 언젠간 가족이 모두 모여 서귀포의 환상처럼 풍요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림을 그렸던 이중섭 특유의 낙천성이 그림에 가득 녹여있는 것일까요? 그의 그림을 보면 나의 걱정과 불안들은 잠시 잊히고 아이의 천진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림 속의 아이들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하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습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당시 이중섭이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