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3
그림 속의 아이들이 ‘ 다 괜찮아. 잘 될 거야.’ 하고 이야기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이중섭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을까요?
늦은 밤 혼자 방에 앉아 내담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에도 몇 번 이야기를 나누었던 내담자가 오랜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이어폰 넘어 들리는 목소리가 떨리고, 격양되어 있었습니다.
'그냥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나는 정말 있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돈도 벌고, 공부도 하고, 주변 사람들 이야기도 들어주는데 나아지는 게 없어요. 다 날 떠나가고 나는 매일 혼자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맘 한편이 아렸습니다. 꿈으로 부풀어 온갖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었으면 하는 나이에 현실에 지쳐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은 청년을 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데 현실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주변 사람들은 다 떠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야기할 곳도 없는 그의 삶이 얼마나 외롭고 지칠까 막연히 짐작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울면서 밤새 과제를 했고, 한두 시간 쪽잠을 자고 아침 아르바이트에 늦지 않게 나갔습니다. 지치고 지쳐 그냥 쓰러져 버리고 싶어도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살고 있다는 그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계속된 좌절에서도 이중섭이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했던 힘은 가족이었을까요?
가족을 일본에 보낸 후 이중섭은 부산에서 친구들의 도움으로 삽화나 표지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나갔고, 이 무렵 은지화를 다루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53년 7월 해운공사 선원자격으로 일본에 가 일주일간 가족들을 만나고 온 이후 가족들과 다시 함께 살겠다는 다짐을 한 이중섭은 돈을 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이중섭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현실을 도피한 화가, 일제를 찬양하는 그림을 그렸던 화가(이중섭이 전쟁에 끌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형이 억지로 넣었다고 합니다.)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민족적이며 한국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그림을 그린 화가입니다.
특히 이중섭은 소를 주제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요. 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자꾸 남의 집 소를 훔쳐봐 소 도둑으로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하니 소를 그리기 위해 얼마나 연구하고 고민했을지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 흰 소가 변화하는 것이 보이시나요? 1952년의 흰 소는 당장이라도 그림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습니다. 눈빛이 부리부리하고, 그 기세가 등등해 보이는데요. 1956년의 흰 소는 형체가 뭉그러져 있고 눈빛도 흐리멍덩하죠. 이전 그림에서 느껴졌던 그 기세는 온대 간데없습니다.
그림 속 소는 이중섭 자신이었을까요?
1955년 미국문화원장 맥타가트 박사가 이중섭의 황소를 칭찬하며 마치 스페인 투우같이 무섭다고 하니 이중섭이 ‘뭐라고 투우라고? 내가 그린 소는 그런 소가 아니고 착하고 고생하는 소 한국의 소란 말이우다!’라고 하고, 여관방에 돌아가 분한 마음에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이중섭의 소는 그냥 동물이 아니라 한국의 얼과 이중섭 본인이 투영된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이후 맥타가트 박사가 그림을 사고 싶다고 했지만 중섭은 팔지 않겠다고 하였고, 결국 다른 친구의 이름으로 10점의 그림을 사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중섭의 첫 미국진출이었죠. 맥타가트는 이후에 뉴욕 근대미술관(MoMA)에 기증의사를 표명하였고, 심의절차를 거쳐 MoMA에 소장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통영의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교사로 일을 하면서도 작품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1954년 12월 25일 통영 성림다방에서 40여 점의 그림으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일 년에도 몇 번씩 작품전을 하며 그림을 쏟아냈습니다. 어려움 없이 곱고 예쁘게만 자란 막내아들이 막노동을 하면서도 매일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그의 애타는 마음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가슴 한편이 아려옵니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후 1955년 1월 미도파 화랑에서 이중섭 작품점을 개최했고, 반응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중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팔아도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춘화로 취급당하는 등 가족과의 재회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서울 전시를 통해 몇몇 그림을 판매했지만 수금이 잘 안 되어 낙심했던 중섭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대구전시를 위해 작업에 몰두합니다. 영화 속 각종 역경을 이겨내며 성공하는 주인공도 이쯤 되면 결실을 보아야 할 것 같은데요. 열심히 준비했던 대구 전시가 큰 반향을 얻지 못하자 가족과 만날 그날만 기다리며 버텼던 이중섭은 좌절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부터 음식을 먹기 어려워하는 거식증의 증상을 보였습니다. 친구인 구상은 이중섭을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이중섭은 가족으로부터 온 편지를 뜯어보지 않기 시작했고, 편지를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이중섭은 삶을 포기했던 걸까요. 중섭이 걱정된 친구들은 그를 서울로 데리고 와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1955년 12월 퇴원 후 정릉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친구들과 함께 지내며 중섭은 조금 안정을 찾는 것 같았지만 계속 음식을 먹지 못했고, 영양실조와 간질환이 악화되면서 이듬해 7월 다시 입원하게 됩니다.
1956년 9월 6일 이중섭은 서대문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지키는 사람 없이 무연고자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중섭의 삶을 보시니 어떠신가요? 계속되는 역경과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가족과의 재회를 위해 애썼던 그의 모습이 그림에서 느껴지시나요?
그 어디에선가 이중섭이 항상 꿈꾸던 가족과의 단란한 한때를 즐기고 있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