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밍,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그날이 왔다. 바로 부상의 날. 클라이머들에게 꼭 한 번은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반갑지 않은 손님, 부상.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이제 어느덧 1년 반. 연클(연속으로 암장에 가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정도로 열정적인 다른 클라이머들에 비하면 소소하게 운동했지만, 그래도 꽤나 꾸준히 착실하게 암장을 다녔다.
실내 암장에서 하는 볼더링은 작고 미끄러운 홀더들을 밟으며 근력과 코어를 사용해 높은 곳에 올라가는 운동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알록달록한 홀더들 사이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알록달록한 색들은 바로 클라이머들의 온몸에 붙어있는 근육테이프이니, 클라이밍은 부상의 위험이 큰 운동이다. 1년 반 동안 암장을 다니며 만난 사람들, 그리고 함께 운동하는 크루원들 중에서도 다들 한 개씩은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훈장 같은(?) 스토리가 있었다. 작은 타박상부터 인대 파열, 심지어는 발목 골절 등 큰 수술까지 해야 했던 클라이머도 두 명이나 보았다. 이렇게 수술까지 감행해야 하는 큰 부상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다시 돌아왔다. 알록달록한 암장으로.
그날, 그러니까 나의 부상의 날은 2주 전, 크루의 3주년 파티에서였다. 몸담고 있는 크루가 생긴 지 3주년을 기념하여 영등포에 위치한 한 암장에서 클라이밍 파티를 열었고 40명에 가까운 인원이 모였다. 전날 술을 마신 것 치고는 컨디션이 좋았다. 나는 처음으로 보라색 레벨의 문제도 풀어 나는 꽤나 신이 났고 보라색 레벨을 풀 깜냥이 전혀 안됨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너도나도 도전하는 모습에 나도 신이 나서 쉴 새 없이 벽에 달라붙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여전히 풀 수도 없는 보라색 레벨을 소위 '맛'만 보겠다고 새로운 벽으로 이동하자마자 또 냉큼 벽으로 달려갔다. 내가 좋아하는 다이노(뛰어서 홀드를 잡아야 하는 문제) 문제가 눈앞에 있었고, '다이노는 또 못 참지' 하며 밟아야 하는 홀드의 높이를 충분히 가늠하지도, 루트 파인딩도 충분히 하지 않고 냅다 뛰어버렸다.
매트 끝에서 호기롭게 뛰어 발 홀드를 밟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내 짜리 몽땅한 키에는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한 홀드였고, 심지어 새로운 암벽화를 아직 길들이지도 못한 상황이었는데 잡아야 하는 홀드에만 너무 신경 쓴 탓에 밟아야 하는 홀드를 끝까지 보지 못했던 것. 홀드를 제대로 지지하지 못하고 나는 만세! 자세로 그대로 미끄러졌고, 왼발이 안쪽으로 꺾인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오른발로 점프를 해야 했기에 왼발은 당연히 별다른 힘을 주지 않은 상태였고, 발바닥으로 온전히 착지하지 못한 것이다.
클라이밍을 하다 보면 매우 창피한 자세로 떨어지거나 미끄러질 때가 많다. 그래서 그럴 때는 아픔보다는 민망함에 웃으며 매트에서 내려오는데, 그날은 그럴 수가 없었다. 바닥에 앉은 채로 나는 잠깐 멍- 했고, 발목으로 밀려오는 경험 해보지 못한 통증에 너무 놀랐다. 걷기는 고사하고 기어서 매트 밖으로 나오니 '아, 뭔가 잘못되긴 한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있던 크루원들이 놀라서 다가왔고, 역시나 크고 작은 부상들이 늘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빠르게 응급처치의 손길이 왔다. 데스크 직원 또한 바로 달려와서 부상의 정도를 확인하고, 얼음팩과 압박붕대로 처치를 해주었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프긴 했지만, 조금 쉬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선 얼음을 대고 앉아 쉬었다. 심지어 속으로 '오.. 드디어 나도 부상의 날을 맞는구나.. 진정한(?) 클라이머가 된 것 같구먼..ㅎ'같은 농담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앉아서 쉬고 있어도 통증이 가시지 않았고, 이대로 더 암장에 머물러서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게 하는 것보다는 집에 가서 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어 예정되어 있던 뒤풀이를 못 간다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주변 크루원들이 밤이 되면 분명 크게 부을 것이라고 충고해 줬던 것과 같이 역시나, 정말로, 발목이 미친 듯이 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걸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복숭아뼈가 정말 복숭아처럼 부풀어 올랐고, 발을 땅에 디딜 수가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급하게 일요일에도 하는 병원을 찾아 두고 고통 속에 밤을 보냈다.
다음날, 정형외과에서 X-ray를 찍어보니 뼈에는 이상이 없으나 이 정도로 부었으면 최소 인대 부분파열이라고 했다. 4주 반깁스, 그리고 걷기까지 3개월, 뛰기까지 6개월, 클라이밍에 복귀하는 것은 9개월에서 1년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버렸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고, 더 정확한 진단을 위해 자기공명영상(MRI)를 찍겠다고 했다. 클라이밍을 9개월이나 못한다니, 나는 그 말을 정말 정말 믿고 싶지 않았기에 45만 원이라는 거금을 내고 2시간을 기다려 MRI를 찍었다. 그리고 받은 결과는 인대 완전 파열. 심지어 진단이 더 악화되었다. 하하.
생에 처음 깁스라는 것을 하고 목발을 두 손에 쥐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깁스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나는 어리석게도 깁스라는 것에 묘한 로망 같은 게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이 미워질 정도로 화가 났다. 이 여름에? 내가 좋아하는 여름에? 바다도 못 가고? 클라이밍도 못하고? 심지어 다음 주에 예정되어 있던 볼더링 크루전 대회에도 못 나간단 말이야..? 익숙하지 않은 목발을 짚고 서툴게 병원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너무나도 힘들었다. 몸과 마음이 둘 다.
지난 1년 반동안 클라이밍을 하면서 정말 정말 즐거웠다. 처음 클라이밍 체험을 위해 암장에 들어서는 순간 '이런 세계가 있단 말이야?' 라며 설렜었고, 꾸준히 암장을 다니며 회사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도 많이 풀 수 있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요즘 내 인생에서 유일한 즐거움과 행복은 클라이밍뿐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정도로 스트레스로 가득했던 하루를, 힘든 순간들을 운동으로 떨쳐버릴 수 있었다. 건강하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다 클라이밍 덕분이었다. 주변에도 이 재밌는 것을 왜 안 하냐며 소위 영업을 엄청 해대기도 했다. 그런데 나를 살린 이 클라이밍이라는 구원자가 나를 망쳐(?) 버렸다. 이 고통과 불편함을 감내한 채로 9개월 동안 클라이밍을 할 수 없다니.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명대사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하하.
다친 지 2주가 지났다. 여전히 발은 바닥에 놓을 수도 없을 정도로 아프고, 2주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한 발과 목발의 조합으로 걷기는 너무 어렵다. 집안일은커녕 목발을 짚어야 해서 밥을 차리는 것도 힘에 부친다. 출근을 하기가 힘들어 재택근무라는 배려를 받았지만, 내가 맡은 프로덕션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한창 바쁜 시기에 팀 내에 일손 하나가 빠진 것이라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몸 하나가 불편하고 나니 정말 사지 멀쩡하게 건강한 것이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를 또 새삼 깨닫는다.
아직 재활은 꿈에도 못 꿀 정도로 회복이 더디지만, 그래도 빨리 회복해서 모든 일상에 복귀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일도, 운동도, 소소한 외식과 외출도. 그리고 클라이밍도! 내 인생을 살짝 망치긴 했지만, 여전히 날 구원해준 구원자니까! 알록달록한 암장에 알록달록한 근육테이프를 휘감고 돌아가야지! 물론 안전을 최우선으로! 깝죽거리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