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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리너 Oct 30. 2023

아침고요수목원이 들려주는 목소리

결혼 2주년 기념 여행기

아침고요수목원의 평온한 목소리

나이가 들면 멋지고 눈부신 광경을 볼 때 감동이 적어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20대 때 느끼는 가슴 뛰는 감동에 반해, 40대가 되니 바람 빠진 바퀴처럼 물렁하게 받아들이게 될 때 그렇다. 티브이를 봐도 웬만큼 재미있지 않으면 도대체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지나가는 여고생들이 바람에 굴러가는 돌만 봐도 까르르 하는 것을 심드렁하게 보면서 말이다.
옆에 있는 남편도 가장 크게 웃는 게 “피식” 정도이다.
새해 아침 어김없이 배송되는 “나이 한 살”이라는 택배도 별로 반갑지 않은데, 감동과 웃음이 줄어드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안 웃기는 개그를 듣고 억지웃음을 지을 수도 없고. 물론 웃음요법이라고 억지로라도 “하하하” 웃으면 좋다고는 하는데, 그것도 쉽지는 않다.

메말라가는 웃음과 감정에 대한 해결요법으로 최대한 자연 속에서 콧바람을 씌워주는 것을 택했다.
잔인한 뉴스들과 희한한 일들을 매일 눈으로 보고 접하며 마른 화분처럼 쩍쩍 갈라져가는 감성이, 자연에 접속하면 혹시 다시 재생될까 해서였다.
결혼 후, 임신을 위한 시험관 준비로 휴직하며 세속을 떠나는 나에게 회사동료가 조언을 해준 것이 있다.
“같이 여행을 많이 다니세요!”
“휴양림 수목원 좋은데 많아요.”
누군가는 결혼 전 계약사항으로 한 달에 한번 여행이라는 조건을 걸었다는 기발한 이야기를 나중에 들은 것이 안타까웠다. 집에서 쉬는 것을 낙으로 아는 남편을 어르고 달래 주말 데이트를 주말여행으로 바꾸어 1박 2일로 이곳저곳 다니게 되었다.
결혼 2주년 기념여행은 신체 호르몬 주기를 맞추는 시험관 일정 때문에 또 변경되었다.
제주도는 눈앞에서 물거품으로 변했다. 부담 없는 거리에 있는 가평이 낙점되었다.
강아지를 키우는 재미와 함께 포기해야 할 한 가지는 말쑥한 호텔방이다. 차선책으로 신축이거나 리모델링이 된 애견 펜션을 부지런히 손으로 찾는다.


음악이라면 어떤 장르도 편식하지 않고 맛있게 먹는 나는, 자라섬의 재즈 페스티벌에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었다. 우리가 방문하는 시즌에는 재즈페스티벌이 열리진 않았지만, 강아지 동반 여행지리스트에 자라섬을 올리며, 방문계획을 세웠다.
결혼 전 답답한 마음을 쉬려고 춘천에 가끔 들렸었다. 누군가와 함께 일 때도, 혼자인적도 있었는데, 비교적 편리한 교통편 덕분이었다.
용산역에서 ITX를 타고 1시간 20분 후에는 춘천역에서 도시가 아닌 곳의 공기를 마실 수 있다.
의외의 장소에서 좋은 숙소를 발견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그렇게 채택된 호텔은 지정 숙소가 돼 주었다. 춘천에도 그런 숙소가 있었고, 의암호 근처라 아침저녁 산책을 하며, 낯선 공간에서, 낯선 시선으로 오랫동안 씨름했던 문제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강아지를 키우는 초보 견주 다운 성실함으로, 가방은 아기 기저귀가방 만하다. 만반에 준비를 다 차리고, 정성을 다해 고른 펜션인 만큼 청결하고 강아지 운동장도 널찍했으면 하는 기대감을 차에 싣고, 출발을 외쳤다.


쭉 뻗은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면 2시간도 안 돼, 어느새 초록이 가득한 산세가 눈앞에 펼쳐진다. 사람마다 얼굴 생김새가 다르듯, 강원도와 충청북도 그리고 경상남도의 산에 터를 내린 나무들의 외양은 사뭇 다르다. 같은 소나무 그리고 참나무 일지라도  짙푸름과 뻗어 나간 몸짓이 다르다. 토질이 척박하거나 혹은 비옥한 곳에서 잘 자라거나 양지나 음지에서 잘 자라는 수종들이 나름의 성장통을 겪고, 본래의 모습과 가장 어울린 자리에서 오랜 세월 뿌리내렸으리라.
초록을 눈에 비추는 것만으로 마음속 꽉 끼운 단추 하나를 푼 것처럼 숨쉬기가 편하다.
“어디 가서 점심 먹을까? 닭갈비를 오늘 먹을까 내일 먹을까?”
“일단 숙소에 가서 그 근처 맛집 찾아보자고.”
평소 필요한 말만 정갈하게 하는 남편의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오는 식사메뉴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침고요수목원 근처에 위치한 깨끗하고 애견친화적인 숙소는 아직 포장지는 아직 풀어보지 않아, 메뉴는 이따 정하기로 한다.  
구불구불 펜션촌 골목으로 들어가니, 목적지인 목조건물로 된 독채형 펜션에 다다랐다.
오래돼 보이는 침구 빼면 기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비 오는 자라섬에서 가라앉은 마음을, 가을 정취에 대한 기대로 한껏 채우며, 아침고요수목원엘 갔다.
44살, 47살 신혼부부인 우리는 그동안 “아기”라는 결핍에 집중했던 시간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맞아 한창 단장한 오색찬란한 꽃들이, 울긋불긋한 나무들이 본연의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 아침고요수목원을 천천히 산책했다.

웃고 싶을 때 웃고, 숲 속의 오래된 전통기와집에 쭈그리고 앉아 들꽃과 눈 맞춤을 하기도 했다.
의무감은 없었다. 결혼 후 주변에서 주는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사회적 부담감에서도 멀리 떨어질 수 있었다.


아침고요수목원의 상징인 향나무 천년향의 위엄 앞에 마주 섰다. 흰 수염을 늘어뜨리며, 팔을 꺾는 설움을 딛고, 하늘을 향해 크게 두 팔 벌린 고귀한 정신 앞에서, 세상의 어떤 높은 타이틀이나 부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경외심이 들었다.
자연은 자족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값비싼 보석을 주렁주렁 달지 않아도, 지금 걸치고 있는 옷으로, 이곳에서 숨 쉴 수 있는 것 만으로 자연의 일원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바람을 타고 속삭인다.

우리에게 아직 아기는 찾아오지 않았지만, 맞잡은 두 손은 따뜻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반짝인다. 몇 년을 알고도 남남으로 흩어져 버린 사람들도 있었으나, 서로의 아침을 깨워줄 가장 가까운 “인연”을 찾았으니, 삶의 기적은 이미 곁에 있는 것이다.
아침고요수목원에서 불어오는 알싸한 가을바람은, 가난한 마음으로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감동을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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