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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리너 Oct 27. 2023

별이 빛나는 문자

가을이 되면 찾아오는 사람

“희야 네가 자꾸 받아주니까 그러잖아.”

친구 은경이는 나를 책망하듯 말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지숙언니는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팔과 다리를 꼬고 다니는 정신지체장애 3급 환자였다.

지숙 언니는 모임이 있으면 항상 내 옆에 앉으려 했고, 먼저 말을 걸었다.

“희야 어제 뭐 했어?”

“희야 남자친구 없어?”

“희야 일하러 어디가?”

속사포처럼 나를 뚫을 것처럼 해대는 질문들에 숨 막힐 것 같았다.


지숙 언니는 말할 때마다 의지와 다르게 입이 비뚤어졌지만, 눈에는 삶에 대한 호기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하지만 식사할 때 입안에 밥알을 가득 넣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앞에 앉은 사람이 곤욕을 치렀다. 타인을 배려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 부정적 장애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장애인들과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요즘 많이 볼 수 있는 교육을 잘 받은 장애인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숯 검댕이같이 산발한 거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길고양이처럼 동네를 이곳저곳 배회하며 다니는 언니에게 연민을 느꼈다.

나이는 나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아 보여 4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연애나 남자친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내 연애사에는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았을까?

“언니 안녕하세요~ 네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인내심이 모두 휘발되었던 퇴근길, 질문 총알을 다다다 날리는 언니를 도망치듯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느 날 언니는 한 팔에는 가방을, 다른 한 팔은 버스 손잡이를 휘감고 발레리나처럼 위태로운 자세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버티고 있었다.

“여기 앉으세요.”

만원 버스에서 옆사람들이 자꾸 눈을 찡그리는 걸 보고 언니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나 이제 금방 내려. 나도 일한다 희야! “

“그래요? 축하해요!”

언니는 처음 보는 밝고 화사한 얼굴로 광채를 쏘며 말했다. 공공기관 센터에서 봉투 붙이기, 청소 같은 단순 업무를 맡았지만, 꽤나 당당한 모습으로 말했다.


영화 레인맨을 보면 의사소통이 안 되는 자폐증 형을 보필하는 동생 역할의 톰 크루즈가 나온다. 나는 현실판 톰 크루즈로 언니를 세상으로 이끄는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한다며 영웅심리에 취했던 것일까?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포용력으로 언니 곁을 지켰다. 소아마비로 평생 한 발을 절룩거리셨지만 인자함을 잃지 않으신 작은 아버지, 뇌성마비를 앓고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조사와 형용사 없이 두 단어로 된 문장들 “전 잘 지내요!”, “감사해요!” 씩씩하게 말하며 주변을 환하게 밝혔던 사촌동생이 떠올라서였을까?

장애인과 함께 처음 야유회를 가고, 밥을 먹고 생활하며 받은 심리적 충격에, 자동반사신경으로 무조건 다 받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나무들이 형형색색의 풍성했던 가을 옷을 벗고, 겨울을 맞이하던 시절, 교회에서 충주로 수련회를 떠났다. 창문 밖에는 익숙한 장면이 사라지고, 푸른 산들이 겹겹이 쌓여 우리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술엔 빨간 립스틱을 바른 언니는 연신 갈라진 목소리로 환성을 냈다. 충주 활옥동굴에서는 절뚝절뚝 선두로 나서 줄을 서더니, 굳이 맞지 않는 헬멧을 머리에 쓰려고 애를 썼다.

빨갛고 파란 조명아래 태곳적 순수를 간직한 굴 안에서, 세상과 점차 멀어지고 내 안의 깊은 내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손가락이 다 펴지지 않은 채로 언니는 브이자를 열심히 만들며 사진을 찍었다.

숙소에 도착해 밤이 되자 영롱한 별들이 쏟아질 듯 모빌처럼 하늘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면서, 우리는 생각지 못한 이야기들을 꺼내 놓으며 나와 타인을 받아들였다. 겨울이 되자 풍성했던 옷을 불평 없이 벗어 내려놓는 나무들과 같이 말이다.

동굴 안에서

충주에서 돌아와, 직장을 옮기고 바빠지며 교회모임은 점차 뜸해졌다. 서른 중후반이라는 나이가 나를 추격하자, 골드미스든, 올드미스든 어떻게든 미혼에서 벗어나려 온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이 달라지자 지숙언니와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고,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깊은 밤, 핸드폰에 문자 알림음이 “딩동” 울렸다.

“행복한 연말 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숙 언니였다. 문자에는 글자로 만들어진 별이 많이 떠있었다. 충주의 밤하늘에서 본 그 많은 별들이...

그 별이 나를 옷을 포개 내려놓은 나무들 사이로 불러내자, 낮은 마음으로 언니에게 이야기했다.

“고마워 지숙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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