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특별 편: '단짝'을 찾아서
내겐 단짝친구들이 있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심지어 넉 달간 미국 어학연수를 갔을 때도 두 달 유럽여행을 갔을 때도 마음 한편 내 준 친구. 그들에겐 약점과 상처받아 너덜너덜한 생채기를 내 보일 수 있다.
그 친구들이 나를 단짝이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녀들에게 짝사랑 상대를 터놓고, 나의 가장 내밀한 곳을 공유했다. 자존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과 삶을 공유하기에 난 작은방에 갇힌 괴물이 아닐 수 있었다. 그녀들은 나를 세상으로 연결시키는 인공호흡기 같았다. 내가 만든 세계에서 벗어나, 숨을 쉴 수 있었으니까.
베를린에서 첫 학기를 맞았다. 베를린은 역사적인 도시다.
젊은 예술가들의 에너지가 각종 공연장, 갤러리에서 생동감 있게 넘치고, 베를린 필하모니에서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음악회가 열린다. 학생 신분으로 문화생활을 풍족히 누리진 못했지만, 자유롭고 젊은 유럽의 문화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도시 한편에는 베를린 돔, 카이저 빌헬름 교회, 샬로텐부 르그 성 박물관 섬 등 중세의 고풍스러운 성과 건축물, 박물관들을 통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새로운 문명과 중세 분위기가 공존하고, 유럽의 메트로폴리탄답게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살아가는 팔색조의 매력을 가진 도시.
특히 베를린은 독일 통일 전 구서베를린, 구동베를린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베를린 공과대학 재학시절, 구동베를린출신 친구들과 구서베를린 친구들을 골고루 만났다. 아비투어(독일어 Abitur; 독일식 고교졸업 자격고사)를 마친 18-19살 앳된 독일학생들이 많았다. 그중 부끄러움을 타면서 잘 웃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라는 말이 편한 내가, 개인주의가 익숙한 독일인들이 차갑다고 느껴지던 중이었다.
외국인인 나를 보면 먼저 인사를 건네고, 무슨 말만 하면, 좋다, 멋지다, 아름답다 (프리마! 쉔! 분더바! (독일어; ‘Prima!‘ ‘Schoen!‘ ‘Wunderbar’) 감탄사를 터트리는 친구.
같은 과 독일 친구들은 뜻이 맞는 친구들끼리 그룹을 지어 다니던 무렵.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이 친구가 어느 지역 출신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 구 동베를린 친구들은 정감이 갔다. 좀 덜 자본주의적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구서베를린 출신 친구들이 그렇지 않다는 건 아니다. 마리나를 처음 봤을 때, 구동베를린이나 구 동독 지역 출신일 거라 짐작했다. 소박한 옷차림이나 말투에서 느꼈다.
“안녕?
수업시간 전 마리나 옆으로 가서 말을 건넸다.
”안녕? 잘 지냈어? “
웃을 때 양쪽 뺨에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모습이 예쁘다.
마리나의 아버지는 의사이고, 오빠도 의사란다. 그리고 남부 독일 출신이라고 한다.
과에서 뮌헨이나 슈투트가르트 등 남부 독일 출신 친구들이 있었다. 이 친구들은 독일 가장 부유한 지방인 ‘바이에른’(*) 출신답게 자부심이 남달랐다.
그런데 마리나는 부유한 집안 환경일 거란 예상과 다르게, 외국인들과 함께 공동기숙사(독일어;본게마인샤프트 Wohngemeinschaft) (**)에 살았고, 옷차림이 남루했다. 무슨 사정에선지, 집안 이야기는 잘하지 않았다.
난 독일 친구들과 학교 외에서 만나며 사적인 만남을 통해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면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외국인이라는 이질감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내가 처음 독일 친구의 집에 초대받게 되었다. 바로 마리나의 집이었다.
베를린의 11월을 견딜 수 있는 건 바로 크리스마스 마켓 (독일어; 바이나흐트마르크트 Weihnachtsmarkt) 덕분일 것이다. 11월이 되어 3-4시면 해가 어둑어둑하고, 상점은 6시가 되면 닫아버려서 갈 곳도 없이, 바삐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유니, 나랑 쿠담(독일어 Kurfürstendamm; 베를린에 있는 번화가)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마켓 가보자. 그리고 우리 집에 들러서 소박한 크리스마스 파티 하는 거 어때? “
마리나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여자 친구인 제시는, 자기 이야기를 잘하지 않고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마리나를 두고,
”쟤는 참 수수께끼 같은 애야. “
라며 하교하는 마리나 등뒤에 대고 이야기했다.
수수께끼 같다고 해도, 마리나는 내게 따뜻함으로 다가왔기에 난 그녀를 단짝친구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와인과 쿠키를 들고 마리나의 집에 갔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뜨거운 글뤼바인 (독일어 Gluehwein 독일식 뱅쇼; 계피와 향료 넣고 끓인 포도주)를 마시니 속이 뜨거워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11월의 베를린, 크리스마스 마켓이 없으면 어떻게 긴 어둠을 견딜 수 있을지.
탕후루 같이 설탕옷을 입힌 사과 (독일어 Kandierte Apfel 칸디어테 앞펠)도 한입 앙 베어 물었다.
크리스마스 장에 펼쳐진 아기자기한 장식품, 인형들에 눈이 즐겁다.
마리나는 파스타를 준비해서 대접했다. 함께 기숙사 근처 숲을 산책했다.
마리나가 해주는 음식을 먹고 차도 한잔 먹으니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가족이야기, 그리고 막 헤어진 남자친구 이야기까지.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여러 화제들이 마음속 깊은 곳 샘에서 퐁퐁 솟아났다.
”그건 그 독일 남자애가 너무 나간 거다. “
독일남자애가 나에게 한 멘트가 플러팅(추파 던지기) 인걸 알려준다.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린다.
”우리과 학장님은 노동자 부모님 가정 출신이야. 점수도 관대하게 주지. “
”라인하르트 교수님 과제는 특히 구성이 중요해. “
마리나는 내가 알아듣지 못한 독일식 제스처와 언어의 숨겨진 뜻을 해석해 주고, 과 교수님들의 특성을 일러주었다. 눈앞에 뿌연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수업시간에 창밖을 보고 멍하게 있었나 보다. 누군가 나에게 종이쪽지를 건넨다.
‘유니, 넌 슬플 때 더 아름다워!’
감정을 깊이 공유하는 ‘단짝 친구’의 케미가 느껴졌다.
마리나가 나를 보면서 눈을 찡긋한다. 잠시 머물다간 사랑의 결말이 이별로 판명되자, 내 속에 장기 하나가 절단 난 것 같이 아팠다. 마리나가 옆에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4학기가 지나자 포어디플롬 (독일어 Vordiplom; 석사 전 받는 학위)이라는 학위를 받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시점이 왔다. 독일 친구들은 빠르게 치고 나가, 하나 둘 포어디플롬을 받는데 문제가 없었다.
난 악명 높은 통계학 시험과 여러 소논문들을 앞에 가득 쌓아두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마리나는 나에게 통계학 시험 팁을 주었다.
”인샬라“
내가 힘들어할 때면 ‘신의 뜻이라면’이라는 이슬람 말을 해주었다. 마리나는 북아프리카인 아랍계열 오마르라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이슬람 남자친구 괜찮아? “
난 예쁘고 똑똑한 마리나가 아프리카 계열 남자친구를 만나는 게 아깝게 느껴졌다.
”왜 안돼? (독일어; 바룸 니히트?)“
마리나는 웃으며 말했다. 나의 편견도 마리나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자유롭고 거칠 것 없이 사랑했던 마리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리나는 졸업할 때 내게 ‘탱고 모음 CD’를 선물했다.
언젠가 마리나의 집에서 함께 들었던 탱고 음악을 좋아했던 나를 잊지 않고.
아름답고 강인했던 마리나.
한국에 와서 스카이프(Skype)로 통화하기도 했다.
다음날 일요일 토익시험을 본다고 하니,
”한국에서는 일요일에도 시험을 치르는구나! 그게 바로 문화지. “
문화란 사회 구성원이 암묵적으로 규정하는 규칙들, 당연시되는 것들.
마리나가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나 역시 일요일에 시험 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메일에 항상 너를 힘껏 포옹해, 너를 사랑하는 여자친구 마리나, 라며 사랑 표현을 아끼지 않는 따뜻한 친구.
이맘때쯤이면 베를린 쿠담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함께 따뜻한 글류 바인을 호호 불며 마시면서, 겨자소스를 듬뿍 바른 브랏부어스트 (독일어 Bratwurst; 소시지) 맛있게 먹었을 텐데.
나의 두려움, 자격지심,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나를 깨우고 삶의 용기를 주었던 마리나. 지금은 BTS의 팬이 되어 텔레비전에서 볼 때마다 나를 떠올린다고 한다.
마리나는 독일 단짝친구로 여전히 내 마음속에 생동감 있게 살고 있다.
독일 단짝친구, 보고 싶을 때마다 마음속 채널을 돌려 베를린 유학시절로 돌아간다. 독일 문화의 징검다리가 되어주고, 내 작은 기숙사 방에, '자유'라는 이름으로 날아온 새 ‘마리나’.
할머니가 되어서 무모하지만 아름다웠던 학창 시절 이야기 나누자. 그때까지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줘.
*바이에른: 바이에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독일인이라기보다는 '바이에른인'으로 인식하고, 다른 독일인들 역시 바이에른 인들을 독일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인식한다.
** WG (본게마인샤프트) : 개인 기숙사 방과 여러 명이 거실과 화장실을 공유
출처: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