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독일아주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12시간의 비행과 3시간여의 기차여행 후 온몸에 퍼지는 노곤함을 잊은 채, 장미에 코를 대고 향을 맡았다. 그리고 내가 살아야 할 새로운 방에 들어서며 흥분과 불안을 느꼈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다. 고향의 사전적 어미를 찾아보면 첫 번째, 나고 자란 곳 두 번째,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그리고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라는 뜻이 있다.
해외 입양인들이 자신들이 신생아시절 버려졌던 장소에 다시 찾아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찾아 여러 번 고국을 다시 찾는 이유는, 존재의 뿌리를 찾기 위함이 아닐까.
사회학에서 정체성이란 나와 사회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서 형성이 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개인의 정체성이 모여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는 개인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개인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그 구조가 성립되고 생성되며 또한 변경된다. 고향은 내게 정체성이 형성되도록 무대를 제공하는 곳이다. 입양인들은 정체성이 형성되는 공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본질을 찾아 그토록 고향을 찾는 것일 것이다. 스위스에 입양된 사회적으로 성공한 한 한국인 입양인은 고향과 단절되고 부재한 상태에 대해, 몸 위는 따뜻한 강 위에서 헤엄치고 있는데, 무릎아래는 소름 끼치도록 차갑다고 표현했다.
난 서울 태생이고,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평범한 한국 여성이다.
나에겐 제2의 고향이 있다. 한국에서 독어독문학을 졸업하고 독일 쾰른 대성당 근방 보쿰이라는 서부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보쿰에서 언어의 장벽, 문화의 차이를 온몸으로 느끼며 깨지고 부서지면서 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나라에서 알을 깨는 과정을 겪은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역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면 돼요?”
“네 이쪽으로 가시면 돼요”
“한국에서 유학 오셨어요?”
“네... 오늘 독일에 도착했어요..”
“누구의 말도 그대로는 믿지 마세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만난 한국인이 내게 수수께끼처럼 남긴 말이다.
다행히도 보쿰에서 믿음직한 독일인 가족들을 만나 2층의 작은 원룸을 빌려 이국살이는 시작되었다. 볼크스혹흐슐레(Volkshochschule)라는 독일시민대학에서 어학연수를 신청했다. 한국에서 4년간 배웠던 독일어는 막상 입에서 나오지 않아 석 달간은 영어로만 대화를 했다.
독일어 수업을 받고 돌아온 어느 날, 방문밑에 독일어로 된 쪽지가 놓여 있었다.
“오늘은 잘 보냈니?” “요즘 독일어 실력은 늘어가니?”
아네테 아주머니가 보낸 쪽지와 함께 직접 키운 싱싱한 사과나 과일들, 신선한 브로콜리, 셀러리, 양상추 등을 봉지 가득히 담아서 문고리에 걸어두셨다. 난 아네테와 직접 독일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졌고, 이 가족들과 독일어로 하루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기 관련 전공자였던 큰아들 아투어는 내 방에 전자제품이 고장 날 때마다 달려와서 깨끗이 고쳐놓고는 했다. 쑥스러워서인지, 내가 한 “고마워”라는 말을 등뒤로 들으며 빠른 속도로 사라지긴 했지만. 내가 사는 2층에는 방이 2개 있었는데, 옆방에는 이들의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소음방지는 잘 되지 않았는지, 밤마다 TV 소리가 끊길 듯 말 듯 한참 들려왔다. 마치 할머니의 작은 목소리처럼. 할머니는 종종 한국의 뻥튀기 같은 과자를 먹어보라고 주셨다. 생일에는 카드에 축하의 말을 적어서 작은 선물과 함께 건네기도 했다. 축복의 말들을 독일어로 들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이국언어에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름이니까 빨래 말리는 게 쉽지 않을 거야. 모아서 방문에 두렴”
아네테 아주머니는 내가 축축한 빨래들을 방에 걸어두는 걸 알고, 이런 제안을 했다.
난 조금 미안했지만, 마침 청바지와 티셔츠들이 며칠씩 걸려도 마르지 않아, 불편했기에 감사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여름 매일매일 생겨나는 수건, 티셔츠 등의 빨래들을 모아 아네테 아주머니께 건네드렸다.
그러면 아주머니는 건조기에서 빳빳하게 말려진 옷들을 다시 방문 앞에 예쁘게 접어서 주셨다.
그런데 내게 첫날 빨간 장미를 선물했던 당시 15살 라베아는 엄마가 낯선 동양여자의 빨래까지 힘들게 도맡아 해 주는 게 맘에 들지 않았던가 보다. 세탁서비스를 누리며 지내는 어느 날, 함께 사용했던 1층 현관문을 열자 라베아가 인사도 생략한 채 도끼눈을 뜨고 나를 흘겨보는 것이었다. 나는 아네테 아주머니께 부탁한 일도 아닌 일로 나를 미워하는 라베아에게 무척 서운함을 느꼈지만, 라베아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어학수업이 없는 날 아침 난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한참을 터벅터벅 걸으니 꽤 깊은 숲까지 이르게 됐다.
오래된 나무 그루터기에 철퍼덕 앉아서 얼마쯤 지났을까. 옆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개와 산책 중인 아저씨가 와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니?”
아저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독일에 도착해서 계속 적응이 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독일인들의 무표정이었다. 몇 년 전 미국에 잠시 어학연수를 떠났을 때만 해도, 버스기사 아저씨, 슈퍼 자판대에서 만난 아주머니도 생긋생긋 웃으며 “하이 데어”를 연신 말했기 때문에, 무표정한 독일인들이 로봇 같이 느껴지고, 정이 안 갔다. 난 아뇨 아뇨 하면서 황급하게 자리를 떴다. 뒤돌아 생각해 보건대, 그 아저씨는 작은 동양여자애가 깊은 숲 속에서 혼자 앉아 있으니,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 걱정이 돼서 말을 건넨 것 같다. 독일인들의 속 깊은 마음 씀씀이는 겉으로 드러난 표정과는 대조적이라 놀라웠다.
아네테 아주머니의 세탁 서비스는 내가 어학연수를 마치는 1년 넘게 지속되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이 가족들은 나를 인근 독일교회에 데려갔고, 성탄절 부활절 행사에서 인형극도 보고, 함께 독일음식도 나눠먹고 동네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나는 점차 이 동네에 사는 동양인으로서 소속감을 장착하게 되었고, 보쿰에 스며들었다. 이런 깊은 유대감과 소속감은 내가 앞으로 독일 유학생활을 해나가는데 자신감을 주었다. 집 내부에 있는 마당에는 엄청 큰 사과나무가 있었는데, (사실 이 집은 밖에서 보면 큰 하얀색 카라반의 외형을 닮았었다. 집안으로 들어오면 반전) 아네테 아주머니와 함께 앞마당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고 만든 사과잼은 한참 그 맛이 잊히지 않았다.
다음 해 10월 아네테 아주머니의 사과잼, 세탁서비스를 더는 누릴 수 없는 베를린으로 대학 입학을 위해 이사를 가야 했다.
“다른 나라네” 한인 교회 친구들은 북쪽 끝 베를린을 그렇게 불렀다.
진정한 홀로서기를 앞둔 나에게 독일에 생긴 가족들은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베를린에는 없을 환영선물 빨간 장미를 대신하여, 아네테 아주머니가 챙겨준 손바닥만 한 파란 성경책을 이삿짐 가장 깊은 곳에 고이 넣어두었다. 가족과 분리되어 사회와 맺는 새로운 관계를 보쿰에서 마치고, 나는 독일사회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하였다. 독일 가족들은 베를린 독일 유학시절 내내 그들과의 유대감을 통해, 외국인라는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방향을 잃고 헤맬 때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