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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리너 Sep 18. 2023

나는 내 몸이 편안해

베를린에서 대망의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보쿰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학교 입학서류를 제출하여, 베를린 기숙사에 거처를 정하고, 등록관청에 신청을 하고, 은행계좌, 의무 사보험, 학생비자신청 등 일련의 행정일을 처리해야 했다. 학교에서 228106이라는 학번을 부여받게 되었고, 이 번호는 이후 학교를 졸업하는 5년 동안 내가 제출하는 모든 과제와 시험에 따라붙게 된다.

베를린 공과대학 기술사회학과 입학하고 나니, 또래 1학년 독일학생들보다 6-7살은 많은 만학도였다.

다행히 아시아인의 동안 혜택으로 얼추 비슷한 또래로 보는 것 같았다. (혹은 나이에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수도 베를린에 있는 대학인만큼, 독일의 16개 지방 출신의 학생들이 다양하게 모여 있었다. 난 우크라이나에서 온 알렉산드라와 키르기스스탄 출신의 아자드와 뭉쳐 다니면서 외국인학생의 애환을 나누었다


어느 날 모두가 앉아서 교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아침이었다. 독일 학생 중 키가 모델처럼 멀뚱히 큰 카챠라는 친구가 갑자기 강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이고 얼굴엔 슬픔이 가득 차서, 엉엉 울면서 말이다. 나는 많은 학생들 앞에서 저렇게 꺼이꺼이 울 일은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누구에게 물어볼 분위기도 아니어서 잠자코 있었다.

"유니라면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는데 슬퍼서 눈물이 나지 않겠어?"

좀 친해진 독일 친구에게 카챠에 대해 나중에 슬쩍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마치 감정은 표현하는 게 당연하고 당당하다는 것이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해서, 묻는 내가 좀 겸연쩍었다.


60여 명 되는 학과 동급생 중 유일하게 검은 눈을 가진 동양여자애에게 과친구들은(?) 호의적이었다.

사회학과 특성상 프레젠테이션과 토론수업이 많았는데 언어가 부족한 나를 그룹에 잘도 껴주었다.

그중 금발의 아리따운 구 동독출신 크리스틴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생긋 웃어주는 통에, 더 친근감이 가기도 했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가면서 크리스틴의 날씬했던 몸이 점점 불어 청바지가 터질듯해 보였다. 난 속으로 크리스틴이 뭔가 스트레스를 엄청 받거나,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렸겠지라고 생각하고 안타깝게 여겼다

"크리스틴 잘 지내?"

난 등굣길 자전거를 끌고 앞서 걸어가는 크리스틴에게 조심히 말을 걸었다. 속으로는 크리스틴을 위로할 많은 말들을 생각해 두었다

"크리스틴 넌 여전히 아름다워"

"크리스틴 넌 운동을 좋아하니까 맘만 먹으면 살이 금방 빠질 거야"

"너무 속상해하지 마, 넌 길고 풍성한 금발이 참 아름다워" 등등등.


"응! 유니 Juni!(내 이름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독일의 6월이다) 난 잘 지내~ 넌 이번학기 어때?"

크리스틴은 여느 때처럼 밝고 명랑하게 대답했다

"고마워 크리스틴 난 친구들 덕분에 발표수업 잘 준비 중이야. 우리 주제는..."

난 학교에서 독일어로 발표수업을 시작하는 큰 산을 넘는 중이었고 크리스틴과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크리스틴.. 요즘 무슨 일 있어? 최근에 넌 예전과 달라 보여.."

난 조심스럽게 크리스틴의 외적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워낙 개인적인 이야기 특히 외모에 대해서는 불문율처럼 하지 않지만, 크리스틴과는 그 정도 질문은 할 수 있는 사이였다


"아 나? 살찐 거? ㅎㅎ 나는 이제 내 몸을 받아들이고 억지로 바꾸진 않으려고~ "

크리스틴은 편안하게 말을 이어갔다

" 내 몸에 스스로가 불편하지 않다면, 몸을 부끄러워하거나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난 내 몸이 편해~"

크리스틴은 자신의 몸이 편하다고 말했고 표정도 그랬다. 난 준비했던 모든 위로의 말이 갑자기 하얗게 사라지고, 크리스틴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무게가 나의 정체성에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지. 크리스틴은 자유로워 보였고 살이 붙어 허벅지와 엉덩이가 터질 것 같은 청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신나게 타며 수업시간에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이야기했다.


어느 날은 강의실에 앉아서 수업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 디크, 너 다음번에 향수 좀 덜 뿌릴 수 있니? 향이 너무 지독하네"

또 다른 과여자친구는 앞에 앉은 남학생에게 양해를 구했다. 내 얼굴은 앞자리 남자애를 대신하여 화끈거렸다. 직선적인 화법이 특성인 독일인들 중에서도 조금 더 직선적 화법을 구사하는 베를리 너른 (Berlinerin 베를린시민(여성형))의 대화였다. (어느 날은 귀한 김치를 냉장고에 두고 가끔씩 아껴먹는 나에게도 마늘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를 해, 당황시키기도 했다.)


나는 주변에 평범한 독일 여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때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는 옷차림을 하고, 집들이 가라오케에서 몸을 신나게 흔들면서  Dschinghis Khan 칭기즈칸을 불러 제켰다.


자기 몸집보다 큰 자전거를 번쩍 들고 지하철역 계단을 올랐다니며, 도와줄까라고 하면 시크하게 "겟 숀! (Geht schon; 괜찮아!)"이라고 한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표현하는 그들은 한국에서처럼 여자답게, 남자답게라는 성역할에 대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어떤 자리에서도 가장 나다움을 찾아내는 모습이 낯설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들과의 몇 년의 학창 시절은 나와 타인을 향한 외모의 덫에 빠질 때마다 나다움을 찾게 도와주는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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