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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리너 Sep 18. 2023

독일인과 핑퐁 하기

독일인과 핑퐁 하기



2003년 10월 난 드디어 독일 베를린공과대학 기술사회학 대학생이 되었다. 독일 북쪽에 위치했던 베를린에서는 10월 중순이 되자 가을이 우수수 내리기 시작했고,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오면, 우산도 쓰지 않은 학생들이 모자 티를 입고 등교하기 시작했다. 왜 우산을 안 쓰냐고 물으면, 나는 설탕이 아니라고 웃지도 않고 농담을 한다. (설탕은 비에 녹는다)

대학생활이 시작되면서 가장 큰 도전은 토론식 수업과 프레젠테이션이었다.

독일 대학생들은 어릴 적부터 토론문화에 익숙해져 있는지, 교수님이 논제를 던지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유롭게 자신의 논점과 의견을 술술 풀어나갔다. 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해하면서 강의실 한편에 쪼그라져 있었다.

“유니, 핑퐁 (탁구) 알지? 내가 A라고 이야기하면 B라고 받아쳐야지.”

학교에서 가장 맛있는 수학과 건물 멘자 (Mensa; 학생식당)에 마주 앉아 파스타를 먹던 크리스티앙이 말했다.

난 A라는 공이 들어와도 네트 밖으로 보내 버리기 일쑤였다.

“프라우 (Frau; Ms.) 킴은 과정가운데 있어요. “

머리가 반짝반짝 빛나는 대머리 교수님은 나를 마치 연구실의 실험대상처럼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난 20년 넘게 받아온 한국식 교육방식의 괘도를 벗어나 운항 중인 인공위성과도 같았다. 교수님들과 조교들 그리고 동급생들은 전혀 다른 방식과 환경에서 나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사회학과 수업의 특성상 발표수업과 토론수업이 기본적인 수업방침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학생들을 보며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 난 저걸 절대 할 수 없어.”

머릿속에는 독일학생들 앞에서 사회학 주제에 대해 독일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로 가득 차고, 작고 어두운 고치 속에 숨은 애벌레처럼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넌 어디서 왔니?”

“난 우크라이나. 알렉산드라, 알렉스라 불러도 돼”

한쪽 눈을 찡긋하는 금발의 여학생. 독일어 억양이 좀 다르다 싶었더니 역시나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난 키르기스스탄, 아자드.”

어릴 때 독일에 와서 독일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바람에 나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아자드까지 외국학생들 셋이 뭉쳐 다니면서, 독일학생들은 전혀 궁금하지 않은 것 들을 질문하고 함께 고민하고 해결할 수 있었다. 셋이 모여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시작했다.


첫 프레젠테이션을 어떻게 넘겼는지 모르겠다. 교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고, 독일 동급생들은 내 부족한 독일어 한마디라도 놓칠까 초집중을 했다.

“우리 조에 들어오지 않을래?”

플로리안이라는 베를린 출신 남자애가 가볍고 건조하게 말을 걸었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독일 친구들과 조를 이루어 과제의 역할을 분배했고, 발표내용을 적어가면 같은 조 친구들이 내 독일어에 매끄럽게 사포질을 해주었다.


대학시절 스튜어디스를 꿈꾸는 중학교 동창과 함께 토익 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전문대 항공과를 졸업 후 벌써 여러 차례 스튜어디스 시험에 떨어진 후였다. 친구가 원하는 항공사는 4년제 대학 졸업자를 뽑았고, 여러 가지 조건이 스튜어디스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였다. 매번 합격점보다 낮은 토익 점수처럼, 그 친구는 점점 꿈과는 멀어지는 것 같았다.

학교에 복학하고 독일 유학준비를 하는 도중, 그 친구가 당당히 스튜어디스가 되었다고 기뻐하며 이야기했다.

그 이후로 난 누구든 꿈꿀 자격이 있고, 이룰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사회학과 학생답게 과친구들은 나에게 북한의 인권과 한국의 대북 정책 등에 대해 자주 질문했고, 난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더 북한에 관심을 갖고, 재외국민 선거에 참여했다. 독일친구들은 재외국민 선거참여를 독려하며 나의 시선을 사회로 신문으로 돌렸다.

수업 때 OECD 국가 중 한국이 수학점수가 가장 높게 나온 현상에 대해 토론할 때 한마디 할 기회도 있었다.

어느 때는 필기시험에서 독일어 학생들을 앞섰고, 학위논문을 쓸 때는 함께 시작한 독일 친구들 중 중도 포기자가 생기기도 했다.

물론 나도 포기하려고 했던 때가 있었다.

해야 할 것들은 너무 많아 보이고 종착지는 멀어 보이고, 항상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제자리걸음 중인데, 넉넉지 못한 살림에 부모님께서 매달 생활비와 학비를 보내주시는 것도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아버지는 당시 이메일로 매일 정신교육을 시켜 주셨다.  삶에 대한 무겁고 엄숙한 경고장 메일을 받고 나면 난 친구와 시험 후 맥주 한잔 하는 것도 사치라고 느꼈다. 나중에 생각이 바뀌긴 했지만, 지나쳐온 작은 호사는 아쉬움을 남겼다.)

서른이 가까워오자, 디플롬 (Diplom; 석사) 취득까지 소요 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려운데, 친구들은 하나 둘 결혼과 출산 소식까지 전해왔다. 마음이 다급 해졌다. 그 당시 졸업하고 한국에 가면 친구들이 걸었던 결혼 목적지에 자동무빙워크로 도달할 줄 알았나 보다.

내가 디플롬에서 베첼라 (Bachelor; 학사)로 학위를 바꾸어서 졸업 시기를 당긴다고 말씀드리자 담당 교수님은 장학금을 알아봐 주신다고 만류하기도 했다. 한국의 한 독일계 회사에 이력서를 보내자, 전화 인터뷰 요청까지 받고, 마침 공석이었던 자리에 인터뷰를 통과하면 귀국하여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는 게 영 내키지 않았고, 회사에는 졸업 후 연락 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매일 달라지고 있었고 조금씩 목표에 접근하고 있었다.

처음 발표수업을 했을 때 느꼈던 황망함을 기억한다.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느꼈을 때, 두 눈 질끈 감고 내디딘 한 발자국이 나를 계속 앞으로 이끌었고 난 2008년 8월 베첼라 학위와 독일어 석사 자격을 얻게 되었다.

나는 독일 친구들과 멘자에서, 수업시간에, 종강 개강파티에서, 여름 방학 때 함께 떠난 북해 휴양지 뤼겐(Ruegen)에서 핑퐁을 계속 통통 튀기고 있었다. 당시 졸업 논문을 담당하셨던 슐츠 교수님은 굿악텐 (Gutachten; 추천서)에, 인문사회학 전공을 외국어로 도전했던 끈기와 노력을 칭찬해 주셨다.

이때 얻은 것은 졸업장뿐 아니라,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체험을 몸소 했던 것이었고, 이는 누구도 빼앗지 못한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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