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도 식후경 그리고 배변 후에! 대학시절 유럽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이탈리아 남부 폼페이를 여행할 때였다. 로마에서 거의 3시간을 기차 타고 올 때는 느끼지 못했던 변욕이 시동을 걸었다. 머릿속에서 강한 명령어를 보내면 뱃속에서 “부글부글” 반응을 했다. 화장실이 있었던 기차에서도, 역사 내에서도 아무렇지 않다가 이게 무슨. 폼페이 안내소의 검수원이 내 보랏빛 도는 검은 색깔의 머리칼을 보며 인조인간 같다는 농을 던지자, 낯섬에 대한 경계의 갑옷이 헐렁해졌다. 덩달아 *구멍 긴장도 풀린 것 같았다. 선망했던 전설의 도시에 발을 딛자마자, 도저히 다른 어떤 것에도 집중을 할 수 없었다. 2000년 전 화산재와 함께 사라진 도시는 눈에서 사라지고, 머릿속은 안락한 화장실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어느 인적이 없던 오래된 건물 옆에서 화장실을 찾았다. 다시 2000년 전 화산재가 된 도시로 회귀할 수 있었다.
베를린 유학시절 국립미술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리지앵(엔느)은 뉴욕에서 온다”는 특별전시회가 있었다. 이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한국 지혜를 잠시 잊었었나 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19세기 프랑스 미술 걸작품들을 전시했는데, 모네 (Monet),세잔(Cézanne)등 미술교과서에만 만났던 작품을 실제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감동이 있었다. 입장한 지 몇 분도 안되어 뱃속에서 북을 치기 시작했다. 배고파! 배고파! 북을 치는 난쟁이들은 점점 템포가 빨라졌다. 아름다운 명화 앞에서, 미술관 관람 후 먹을 메뉴를 고르느라 머릿속은 바빠졌다. 관람시간은 계획보다 점점 줄어들어, 보고 싶었던 명화들을 속독으로 눈에 빠르 게 비춰주고, 머릿속에서 그린 카페로 내달렸다. 유학시절 다니던 한인교회 목사님이 질그릇 같은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는데, 육신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기 이전에, 깨질 수 있는 질그릇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런던이 아닌 이촌 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니.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전시회는 놓칠 수 없다는 결연한 심정으로, 방문 계획을 세웠다. 개인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나자, 원하는 시간은 이미 매진되고 없었다. 동행하는 친구가 좀 늦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남편의 출근차를 얻어 타고, 가장 회피하고 싶은 출근시간 4호선 전철 서울행에 몸을 실었다.
이촌역에 내리자 친절하게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입장권 발매 시작 30분전 누군가 판매소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덩달아 나도 뛰었다. 전시회 종료일 전 마지막 평일이라 혹시라도 보지 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조바심에 앞서 뛰는 누군가를 제치고 매표소에 도착. 꽈배기처럼 꼬인 두세 줄에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다. 배도 부르고, 변욕도 해결했지만, 입장할 수 있는지 없는지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름다운 명화를 볼 나의 마음상태가 이렇게 경쟁적이고 전투적이라는 모순적 상황에 씁쓸했다. “몇 좌석 남았어요?” “네 오전 시간은 매진이고요. 오후에 몇십 개 남았어요…” QR 코드로 잔여석을 확인하고 있는데, 줄 앞에 섰던 분이 말을 걸었다. “나도 친구랑 미술관 감상 오는데, 예매는 안 해요. 취소할지도 모르는데. 올 수 있는 날 오는 거지!” 예매를 부탁했던 친구에 대한 원망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 전시회는 홍보가 잘 됐나 봐요.” “아.. 홍보…몇 점이 좀 훌륭한가 봐요. 나도 취미로 그리는 사람인데…” 가을볕을 가려줄 챙 넓은 모자를 쓴 중년부인은 그렇게 상황 정리를 하셨다. 명화 몇 점 보러 아침잠 줄이고 앞사람 제치며 잰걸음으로 달려온 것인가? 친구가 도착해서 명절 스트레스를 풀어놓자 우리는 입장 허가를 득할 수 있었다. 예술은 일상과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것일까.
"예술 작품은 신의 완벽함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오직 신만이 창조하시며,
나머지는 모방일 뿐이다." 미켈란젤로의 이 말은 예술에 대한 괴리감을 영원에 대한 동경으로 바꾸었다. 실제로 감상한 명화들은 내가 무의식으로 눌러 놓은 부정적 감정들을 사포질 해준 듯, 가벼워졌다. 가파르게 오른 세탁비에 세탁소 사장님과 옥신각신하며 느꼈던 비루함, 포인트 적립하겠다고 몇 천 원 빵 살 때마다 내미는 포인트카드, SNS에서 잘 나가 보이는 친구들과 처지를 비교하며 느꼈던 비참함 등등이, 명화들이 포착하고 있는 인간의 고귀함에 사포질로 쓸려 나갔다. 크고 위대한 자연 속에 너무 작은 인간의 모습이 표현된 그림을 보니, 아등바등 전투적인 아침도 용서가 됐다. 나는 폭풍우에 가볍게 쓸려 나갈 작은 인간이기에, 똥이 마렵거나 배가 고파도 꼼짝 못 할 인간이기에 모든 흔들림이 용서가 된다. 그래서 명화는 일상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의 구겨졌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고 가벼워진 마음을 선물했다. 끝으로, 경기도 미술관 방문 후 쓴자작시를 소개한다.
경기도 미술관 영원에 목마른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면, 조각가의 낯선 호흡이 부대끼는 속내를 사포질 한다.
렘브란트 63세노후, 파산후 자화상, 이 그림이 방문의 목적
요아힘 베케라르 "4원소: 물" (먼 배경에 어부가 고기를 끌어올리는것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풍어의 기적을 나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