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페라 예술의 영원한 성전(聖殿)
밀라노, 겨울 안개 속을 걷다
밀라노는 까칠한 종갓집 도련님 같은 도시다. 어느 한 구석도 허투른 법이 없다. 이탈리아답지 않게 시종일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도 괜히 마음에 든다. 베네치아같이 이제 머리는 내려놓고 비주얼만 살아있는 관광특구도 아니요, 피렌체와 토스카나처럼 모든 것이 무턱대고 상찬의 대상이 되는 그런 느슨한 땅도 아니다. 대도시 특유의 강박, 대로변의 휘황찬란함과 저잣거리의 음습함이 도시의 수 백 년 전통과 뒤섞여 휘발성 짙은 향수처럼 밀라노를 고아한 기품으로 감싸고 있다. 특히나 밀라노의 겨울은 비할 바 없이 아름답다.
겨울 밀라노의 상징은 대신전의 열주처럼 늘어선 지독한 안개(nebbia)다. 오죽하면 밀라네제들은 스스로를 ‘안개 속에서 태어났다’라고 말할까. 저기 포 강 유역의 평원지대, 그러니까 이탈리아어로 피아누라 파다나(La Pianura padana)라고 부르는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 안개가 밀라노 전체를 둘러싸고 특유의 눅진하면서도 싸늘한 겨울 분위기를 자아낸다. 토스카나의 시골길이나 나폴리 인근의 해안도로에 안개가 낀다면 그저 거추장스러울 뿐이겠지만, 이곳 밀라노에서는 다르다. 바쁘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거대 도시 위를 운명처럼 엄습한 겨울안개는 마치 연회색의 베일처럼 밀라노에 신비한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예술가들이 밀라노의 겨울 안개를 상찬했다. 대문호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소설 <약혼자들>에서, 파졸리니 감독은 영화 <안개 여인>(La Nebbiosa)에서, 틸다 스윈튼의 열연이 빛났던 루카 과다니뇨 감독의 <아이 엠 러브>에서도 밀라노의 겨울 안개는 영화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오페라하우스들이 초가을에 새 시즌의 문을 열때 밀라노에 있는 세계 최고의 오페라하우스 라 스칼라(Teatro alla Scala)만은 유독 겨울안개 속에서 시즌을 개막한다. 도시의 수호성인 성 암브로지오 (Sant'ambrogio)의 탄생 축일인 12월 7일에 열리는 이 특별한 시즌 개막공연을 우리는 흔히 ‘라 프리마’(La Prima)라고 부른다. 이날이 개막일로 정착된 것은 1951년부터이다. 당시 스칼라의 음악감독이었던 마에스트로 빅토르 데 사바타는 28살의 젊은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를 만나고는 전율에 휩싸인다. 찬란하면서도 힘있는 미성, 드라마틱과 콜로라투라의 양 극단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완벽한 테크닉, 거기에 더해진 심오한 극적 자질과 비범한 예술성 등 모든 것을 갖춘 칼라스에게 데 사바타는 ‘겨울 밀라노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해 마리아 칼라스를 여주인공 엘레나로 기용한 베르디의 대작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I Vespri Siciliani>는 기념비적인 대성공을 거두었고, 데 사바타는 이 참에 스칼라의 시즌 개막을 12월로 옮겨 버린다. 1953년에 탄생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오페라 레코딩 <토스카 Tosca> 또한 빅토르 데 사바타와 마리아 칼라스 두 예술가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1951년 시즌 개막공연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마리아 칼라스, 데 사바타, 보리스 크리스토프)
(<토스카> 레코딩 세션 장면. 빅토르 데 사바타, 마리아 칼라스, 주세페 디 스테파노, 티토 곱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