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스칼라 Teatro alla Scala ②

- 밀라노 그랜드 호텔 Grand Hotel et de Milan

by 황지원

‘오페라의 꿈이 탄생한 곳’ 밀라노 그랜드 호텔


“토디오 카사 도라타!” (T’odio, casa dorata! L’immagin sei d’un mondo incipriato e vano! 이 황금빛 궁전을 증오한다. 공허로 가득 찬 허상의 세계여!)

북이탈리아 파르마 태생의 바리톤 루카 살씨가 피를 토하듯 격정적인 고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Andrea Chenier>의 카를로 제라르 역이다. 그는 일개 하인에서 장차 혁명지사로 변신할 남자였다. 위대한 바리톤의 뜨거운 음성에 객석엔 연신 예민한 전율이 감돌았다. 이번엔 마에스트로 리카르도 샤이의 압도적인 지휘봉이 온 극장을 휘젓기 시작한다. 이 거장은 60대 후반임에도 산 시로 스타디움을 질주하는 AC밀란의 풀백 테오 에르난데스보다도 더 숨 가쁘게 음표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폭주 기관차 같은 오케스트라의 전진에 객석은 다시금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최후의 피날레, 거대하게 엉겨 붙은 두 주역의 2중창이 끝나자 객석의 환호가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커튼콜과 꽃다발의 세례들. 이곳은 더 이상 21세기가 아니었다. ‘어제의 세계’로 단숨에 시간 여행을 떠난 듯했다.


(Luca Salsi, <Andrea Chenier> Teatro alla Scala)


밀라노의 중심가 ‘첸트로 스토리코’ 주변은 현대의 밀라노와 구 세계의 유럽이 공존하거나 혹은 충돌하는 공간이다. 두오모 대성당을 지나 유리로 뒤덮인 갈레리아 쇼핑몰을 걸어서 통과하면 세계 패션 산업의 성지인 몬테 나폴레오네 거리가 나온다. 한낮부터 수많은 셀럽들이 오가는 곳이며, 운이 좋으면 손수 마네킹을 매만지며 디스플레이를 정돈하는 조르지오 아르마니나 도메니코 돌체의 모습을 볼 수 있기도 있다. 불가리, 아르마니, 만다린 오리엔탈, 포시즌스, 파크햐앗트 등 세상에서 제일 값비싼 호텔이 줄지어 늘어선 건 우연이 아니다. 거기엔 또 카를로 크라코, 니코 로미토, 안드레아 귀다 등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셰프들이 이끄는 수많은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들이 있어서 눈과 입이 모두 즐거운 초현대식 이탈리아 요리들을 내놓는다. 너무도 화려하고 패셔너블하며, 동시에 시끄럽고 분주하게 돌아가는 수직적 메트로폴리스. 사람들이 밀라노를 좋거나 싫다고 말하는 건 대개 이 지점이다. 아니, 사람들은 밀라노의 이런 면만을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아름답고 위대한 세계가 그 바로 옆에 존재하는데도 말이다. 브레라 지구의 조용한 갤러리에서, 라 스칼라 오페라의 붉은 객석에서 우리는 ‘빈티지 밀라노’의 찬란한 품위와 은빛 우아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100여 년 전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처음으로 유럽 땅에 건너왔던 한 미국 청년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았던 풍경이기도 했다. 그는 후일 소설에서 이 시대의 밀라노를 담담하면서도 아련히 묘사했는데, 바로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의 어네스트 헤밍웨이이다.


소설 속의 카페 코바와 그랜드 호텔은 아직도 밀라노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밀라노 그랜드 호텔(Grand Hotel et de Milan)은 라 스칼라에서 브레라 쪽으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데, 1863년에 문을 열었으니 이미 그 역사가 150년이 넘었다. 이곳은 모든 것이 '클래식'하다. 예약을 하면 2주 전쯤에 담당 매니저가 연락을 해오는데, 고객의 동선과 취향, 필요한 서비스 등을 세심하게 체크한다. 객실을 오가는 목조 엘리베이터는 19세기말에 만들어져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전의 주세페 베르디가 타고 다니던 것이라 한다. 프런트 로비도 개관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좋은 건 궁정식 옛 건물이라 객실의 창문을 활짝 열 수가 있다는 점이다. 현대식 특급 호텔이라 해봐야 고객의 안전을 위한답시고 창문 제일 위쪽의 숨구멍만 살짝 터주는 식이니, 목조틀로 된 객실의 모든 창문을 열어 바로 앞 알레산드로 만초니 거리를 마음껏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은 실로 ‘밀라노의 테라스’라 불릴만하다.



위치도 라 스칼라에서 겨우 두 블록 정도다. 구시가지 한복판답게 울퉁불퉁 구불거리는 돌길이 계속되지만 오페라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거인들이 모두 이 길을 따라 스칼라로 향했다. 마리아 칼라스의 라이벌로 유명했던 위대한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 1922-2004)에게도 잊을 수 없는 길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화염에 휩싸인 스칼라가 다시금 복구되자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의 젊은 재능들을 찾아내 재건 콘서트 무대에 세우고자 했다. 이때 기나긴 오디션 리스트의 끝자락을 차지한 것이 소프라노 테발디. “동부 해안 페자로 태생의 시골 소녀였어요. 번쩍이는 대도시의 세계 최고 오페라하우스에서, 그것도 가장 위대한 마에스트로 토스카니니를 만나는데 떨리지 않을 수 있나요?” 그녀는 뛰는 가슴을 달래려 그랜드 호텔 주변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다고 회고했다. 베르디와 푸치니의 거룩한 영혼이 자신을 수호해 주기를 기도하면서. 그래서였을까. 토스카니니는 레나타 테발디의 아름다운 노래에 곧장 매혹되어 ‘천사의 목소리’(La Voce D'Angelo)라는 극찬을 내렸다.



방금 본 오페라의 감동이 귓가를 울리는 이명(耳鳴)처럼 계속되는 가운데 한밤의 호텔 식당에서 리조토 한 접시를 받아 들었다. 밀라노에서도 가장 오소독스한 이 식당은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이름을 딴 <돈 카를로스 Don Carlos>. 밀라노를 대표하는 리조토 알로 자페라노(Risotto allo zafferano)는 당연히 이곳의 시그니처다. 샤프란을 듬뿍 넣은 쌀 요리로, 흔히 밀라노식 리조토로 통칭되는 바로 그것이다. 밀라노는 국제적인 대도시라 전통문화에도 조금씩 변형이 들어간 것이 많다. 시내의 유명 카페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아메리카노 커피를 팔고, 테이크아웃 서비스도 있다. 최근에는 스타벅스도 문을 열었다. 리조토 또한 미국이나 아시아에서 온 여행객들이 먹기 좋도록 여러 가지 변형을 하거나 좀 더 부드럽게 삶아낸 인터내셔널 버전이 여럿 존재한다. 그랜드 호텔만은 예외다. 19세기 밀라노의 공작들이나 먹을 수 있었다는 이 값비싸고 손이 많이 가는 까다로운 요리를 아직도 원형 그대로 내놓는다. 접시 한가운데에는 소 정강이 뼈 하나가 얹어져 있고, 포강 유역의 대평원 피아누라 파다나에서 수확된 질 좋은 쌀은 딱딱한 외피가 그대로 느껴지도록 버터에 한 번 토스팅을 한 후 조려낸다. 알덴테로 삶아 치아에 의도적인 이물감이 느껴지도록 하면서도, 또 꼭꼭 씹어보면 진득한 전분질 덕에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기묘한 식감이다. 완벽하게 전통적이며 까다롭고 클래식하다. 모던 갤러리풍의 세련된 리조토와는 결이 완전히 다른 음식이다. 까끌거리는 쌀의 식감과 깊고 풍부한 육향의 소스가 그저 19세기의 전통을 묵묵히 따르고 있다. 오페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어차피 이 세상의 최신 트렌드와는 별반 상관없는 예술이다. 그러나 시공간을 뛰어넘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비경(祕境)을 아직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랜드 호텔이 그랬고, 밀라노 라 스칼라의 오페라가 주는 감동이 또한 그러했다.



다음 날 아침이다. 그랜드 호텔을 찾는 오페라 팬들이 알음알음 비밀리에 묵언수행처럼 행하는 작은 의식이 하나 남았다. 호텔 내의 특별한 객실들 중 한 곳을 둘러보는 시간이다. ‘헌정의 방(Camere Dedicate)’이라 불리는 곳들인데, 주세페 베르디를 필두로, 20세기 초의 대시인 가브리엘레 다눈치오,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 연출가 조르지오 스트렐러, 테너 엔리코 카루소와 마리아 칼라스의 전용룸 등이 있다. 오페라 시즌이 한창이면 대개 모든 방이 만실이지만, 그날따라 114호 ‘마리아 메네기니 칼라스룸’이 비어 있었다. 안내를 맡은 줄리아나가 열쇠를 돌려 조용히 방을 보여준다. 담백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객실 곳곳엔 생전의 칼라스가 노래했던 오페라 무대의 공연 사진들이 걸려있다. 1950년에 처음 밀라노를 방문한 칼라스는 도시의 휘황찬란함 뒤에 숨은 특유의 고요한 기품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즈음 불굴의 사자와도 같았던 그녀는 수많은 명연으로 라 스칼라의 살아 있는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었다.


(<La Traviata> Rehearsal, Maria Callas & Luchino Visconti)


1955년의 전설적인 <라 트라비아타>도 그랜드 호텔에서 탄생했다. 탐미주의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 그가 발탁한 의상 디자이너 다닐로 도나티, 그리고 칼라스 부부가 모두 이 호텔에 머물며 함께 작업회의를 했다고 한다. 이제는 당시의 오페라 팬들이 구전하는 기억 정도로만 남아 있는 일종의 신화적 공연이지만, 여기 그랜드 호텔의 칼라스 룸에 들어서 보니 마치 살아있는 현재처럼 생생한 감각이 느껴진다. 역사의 무게와 기품이 살아있는 이 고적한 분위기의 객실이야말로 라 스칼라의 두 번째 무대이며, 진정으로 수고로운 노력을 통해 찾아야 할 오페라의 숨은 성지였다.


(<La Traviata> 1955 Teatro alla Scala)


keyword
작가의 이전글라 스칼라 Teatro alla Scala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