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식 비극
북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무어인)으로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의 장군 자리까지 오른 오텔로(테너)는 원로원 의원의 딸이자 젊고 아름다운 여인 데스데모나(소프라노)와 사랑으로 맺어진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부하 이아고(바리톤)의 간계에 의해 거대한 ‘질투의 늪’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는 원래 지적이고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처음엔 애써 이성적인 태도를 취한다. 부인이 자신의 부관인 카시오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모함에도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일 파쪼레토(il fazzoletto), 즉 손수건이 문제였다. 오텔로가 사랑의 증표로 데스데모나에게 선물한 - 촘촘한 자수가 놓인, 오직 베네치아의 부라노섬에서만 생산되는 - 그 손수건이 이아고의 설계로 카시오의 방에서 발견된다. 이후 오페라는 걷잡을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달아 결국 오텔로는 데스데모나를 교살하고 만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원작으로,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상 가장 파란을 일으킨 문제적인 걸작 <오텔로>는 베르디의 나이 74세가 되던 1887년 2월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침묵과 은둔의 세월 속에서
베르디는 <아이다>(1871)를 발표한 이후 고향 땅에 칩거하며 오페라계에서 사실상 은퇴상태에 있었다. 이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영민한 대본가이자 작곡가였던 후배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였다. 보이토는 베르디가 평생 동안 천착했던 셰익스피어의 걸작 비극을 완벽한 형태로 각색하여 가져갔다. 보이토의 대본에서 원작의 1막은 통째로 삭제되고, 오텔로가 폭풍우를 해치고 키프로스섬에 상륙하는 장면에서부터 오페라가 시작된다. 밀도 있고 숨 가쁜 전개와 아름답고 극적이면서도 사변적인 시어로 가득 찬 대본은 주세페 베르디의 뜨거운 창작열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이때 베르디는 이미 일흔을 넘긴 나이였지만 오페라 예술에 있어서만은 영원한 청년이었다.
결국 70이 넘은 노대가의 손에서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방가르드가 탄생한다. <오텔로>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새로운 혁명선언에 해당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독일의 리하르트 바그너가 성악 위주의 이탈리아 오페라가 가진 한계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음악과 극이 균형을 이뤄 유기적인 통합을 이룬 오페라를 연이어 발표하자 이탈리아 작곡가들도 이에 대해 답을 내놓아야 할 처치에 놓인다. <오텔로>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유구한 전통인 성악 중심의 선율 라인을 잃지 않으면서도, 아리아보다는 중창과 오케스트라를 작품의 중심에 배치하는 등 음악과 극이 유기적으로 얽히며 숨 가쁘게 전개되는 작품이다. 바그너의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오페라 종가의 당주 주세페 베르디가 내놓은 예술적 답변이 <오텔로>라고 할 수 있다.
각 막마다 유명 아리아들이 포진하고 있지만 이들 모두 종지(終止) 없이 처리되어, 전통적인 형태의 오페라 아리아라기보다는 연극 무대에서의 인상적인 모놀로그를 지켜보는 느낌이다. 관객 또한 중간 박수를 보낼 타이밍이 전혀 없다. 영웅적인 테너나 찬란한 음성의 소프라노가 황홀한 아리아를 쏟아내고, 이에 열광한 관객들이 '비스'(Bis, 한번 더)를 외치며 아리아를 반복해서 청해 듣는 옛 시대의 관습은 <오텔로>에서는 애초 벌어질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오텔로>의 가장 유명한 아리아는 3막에 등장하는 오텔로의 'Dio mi potevi scagliar'(신이여, 어찌하여 제게 이런 치욕을)인데, 듣는 이의 숨을 멎게 만드는 극적이고 심오한 노래지만 종지 없이 곧바로 다음 장면으로 연결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njs-aQy_89c
노년의 아방가르드
신화적인 소재, 추상적인 분위기, 철학적인 테마와 반음계적인 음악언어 등으로 대표되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Musikdrama) 이론은 19세기말 이탈리아의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강렬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들은 노래 중심의 전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를 낡고 퇴행적인 것으로 바라보았고, 기존 주류 오페라계의 대표 작곡가였던 주세페 베르디는 극복해야 할 구시대의 잔재 정도로 취급하였다. 사실은 젊은 시절 아리고 보이토 또한 이런 태도를 보인 대표적인 예술가였다. 보이토는 '스카필리아투라'(Scapigliatura)라고 해서, 당대의 최첨단 아방가드 예술을 추구하던 젊은 예술가 운동 그룹의 핵심 멤버였다. 그는 베르디보다 바그너를 숭앙했고, 바그너처럼 대본과 음악을 동시에 쓰고, 그 위에 북구풍의 심오한 철학적 메시지를 지닌 장대한 스케일의 총체음악극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보이토는 자신이 실제로 오페라를 작곡해 보고 나서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주세페 베르디가 얼마나 위대한 대작곡가인지를.
결국 보이토는 자신이 직접 쓴 대본 뭉치를 챙겨 들고는 고향 땅 인근에서 은둔 중이던 베르디를 찾아 나선다. 베르디의 거처인 산타가타의 빌라 베르디(Villa Verdi)는 21세기인 지금에도 찾아가기 힘든 곳이다. 황량한 들판 사이로 간신히 닦아놓은 한 줄짜리 도로가 차선표시도 없이 이어져 있고, 도저히 여긴 집이나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세상의 바로 끝 지점'에 베르디의 집이 숨어 서 있다. 구글 지도를 켜고도 찾아오기 힘든 곳이니, 19세기말에 도로도 없는 비포장의 메마른 밭두렁 길을 통과해 베르디를 찾아간 보이토의 심정은 '삼고초려'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베르디는 한때 자신을 가혹하게 공격했던 보이토에게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아니면 그가 들고 온 놀라운 스타일의 오페라 대본이 '잠자던 사자'인 베르디의 예술혼을 날카롭게 깨워냈는지도 모른다. 베르디는 15년 가까이 이어져온 은거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오페라계로, 밀라노의 라 스칼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식 비극
베르디는 <오텔로>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이탈리아식 총체음악극'을 창조했다. 자신이 평생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기존의 성공 방정식을 모두 다 저버리고, 74세의 나이에 이르러 그간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길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 불굴의 예술혼에는 절로 경외감이 느껴진다.
오페라는 초연부터 관객들의 열광적인 환호성에 휩싸였다. 막이 내릴 때마다 라 스칼라가 떠나갈 듯한 박수갈채가 쏟아졌으며, 흥분을 주체 못한 이들은 베르디의 숙소인 그랜드 호텔까지 달려가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비바 베르디!'를 외쳐댈 정도였다고 한다. <오텔로>의 위대함에 관해서는 아일랜드의 대문호 버나드 쇼의 촌철살인이 가장 유명하다. 그는 "오셀로는 셰익스피어에 의해 이탈리아 오페라 스타일로 쓰인 희곡이다"(Instead of Otello being an Italian opera written in the style of Shakespeare, Othello is a play written by Shakespeare in the style of Italian opera.)라는 의미심장한 명문장으로 베르디의 마스터피스에 기념비적인 헌사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