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효창 응봉 최중원 Nov 25. 2019

무라키상

한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했다. 한 동안 나는 그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좋은 바의 단골이 되어, 무심한, 하지만 음악의 취향이 좋고 칵테일을 만드는 솜씨가 일품인 오너-바텐더와 시시한 주제로 이야기나 하며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고, 기분 좋은 취기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에 올라온 뒤에 이런저런 동네의 작은 원룸들을 전전하면서 나는 단 한 번도 마음에 들 만한 바를 본 적이 없었다. 어떤 바들에서는 미스에이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어떤 바에서는 구석에 앉은 젊은 대학생 커플들이 쉴 새 없이 키스를 해 댔다. 어떤 바들에서는 예쁘거나 잘 생긴 바텐더들이, 마치 칵테일을 만들어 주는 것보다 말을 걸어주는 것이 더 주된 일이기라도 한 듯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였다. 지금까지 내가 겪어본 바들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자 듣고 있던 어떤 형이 나에게 한남동 어디쯤에 간판 하나 없이 있다는 바에 대해 말해줬다. 벽의 어느 쪽을 밀면 벽 전체가 빙글하고 돌면서 출입구가 나타난다고 했다. 칵테일은 하나같이 완벽하며, 마티니에 넣어주는 올리브조차 스페인에서 직수입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의 지갑은 언제나 비참하리만큼 얇았고, 한남동의 그 바에서 잭콕이라도 한 잔 마신다면 분명히 집까지 몇 시간을 걸어와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나의 음주생활은 보통, 집에서 유튜브를 보면서 4캔에 만원 하는 편의점 세계맥주를 마시는 것이었다.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계속 언급이 될 이 남자의 이름을 무라키상이라고 해보자) 별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도 언제나 맥주를, 위스키를 원하는 만큼 마시고, 브룩스 브라더스의 피케셔츠를 살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부모님은 언제나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만의 돈을 벌고 있었고, 나 역시 취업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과를 졸업한 바람에 여유는 전혀 없었다.  당시의 나는 아르바이트 두 개를 동시에 뛰면서 어떻게 나의 삶이 계속 굴러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궁리해야 했다. 나의 방 역시 언제나 비좁았다. <1973년의 핀볼>처럼 어느 날 갑자기 쌍둥이 두 명이 내 방에 눌러앉게 되는 전개는 내게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말을 꺼낸 김에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무라키상에게는 언제나 여자들이 몰린다. 비록 진짜 „사랑“이라고 할 만한 관계는 부재하거나, 파탄이 나거나, 어딘가가 결핍되어 주인공을 괴롭히지만. 굳이 이 대목에서 나의 상황을 말해서 나를 더 비참하게 묘사하고 싶지는 않다. 정리하다면 모든 면에서 나는 하루키의 책에 나오는 무라키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하나, 내가 그 무심하고 쿨한, 지갑이 두둑한 남자들과 비슷한 것이 있다면, 나 역시 „모험“이라고 할 만한 것을 한 번 겪어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느 „바“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하는 모험을.




왕십리역 뒤편에, 몇 개의 술집과 밥집이 모여있는 그리 길지 않은 골목이 하나 있다. 그 골목의 끝 어느 허름한 건물 이층에 크지 않은 바가 하나 있었다. 손님은 언제나 없었고 테이블은 항상 조금 끈적여서 맨살에 닿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음악 선곡은 좀 올드하고 진부해서, 어떨 때는 이글스의 노래가, 어떨 때는 비틀스의 노래가 하루 종일 나왔다. 바텐더는 어딘가 샌님 같은 구석이 있는, 전업 고시생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칵테일은 그럭저럭 마실만 하게 말 줄 알았다. 내가 살던 원룸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바였고 그 외에는 별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나는 종종 혼자 그 바의 창가 자리에 앉아서 밖 풍경을 보면서 블랙러시안이나 잭콕, 쿠바 리브레, 미도리 샤워 따위를 마셨다. 그것이 가능한 거의 최고의 사치였다.


그 날의 나는 좀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평소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신 상태였다. 편의점 사장이 나한테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서 화를 냈다. 피고용인의 입장으로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아르바이트 월급이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상태였고, 나는 알바가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와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를 세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서, 연달아 두 잔을 마셨다. 취기가 나른하게 올라왔다. 두 잔째를 비우고 나서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에야 나는 내 옆에 어떤 여자가 앉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 누, 누구세요? “ 하고 깜짝 놀란 내가 물었다. 

    눈에 띄는 특징이라곤 거의 하나도 없는, 나이가 몇 살쯤 인지도 짐작이 되지 않는 여자였다. 중키에 조금 통통한 몸,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는 숏컷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스니커즈에 청바지, 회색 후드티 차림이었다. 그 여자는 내 물음에 답하는 대신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좋아해요?“

    „아,음… 종종 마셔요.“ 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바텐더, 나는 부시밀로 한 잔 주세요. 얼음은 필요 없어요 “ 방금 자신이 나에게 질문했다는 것을 잊기라도 한 마냥 숏컷의 여자는 뒤를 돌아, 손을 번쩍 들어 바텐더에게 아일랜드 위스키를 주문했다. 그리곤 다시 나에게로 몸을 돌려 또 물었다. „ 이 바 자주와요?“

    „아, 네. 나름 단골입니다.“ 나는 또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바텐더, 잔은 입구가 좁은 것으로 주세요!“ 하고 여자는 또 내 대답을 한 귀로 흘리고 바텐더에게 외쳤다. 그리곤 몸을 다시 나에게 돌려서 말했다. „그래야 향을 더 잘 맡을 수가 있거든요“


나는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바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원래 영화에서나 일어나던 일이 아니었는가. 무슨 몰래카메라라도 찍는 것일까? 나는 바를 두리번거려봤지만 이상한 것은 볼 수 없었다. 바에는 여전히 사람이 없었고, 바텐더는 여전히 샌님 같은 표정으로 위스키를 따르고 있었다. 

    „저기요, 누구랑 말할 때 그렇게 다른 곳 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에요. 부모님이 그런 것도 안 가르쳐줬나 봐요? “ 하고 그 여자가 얼굴을 내 시야 가득 들이밀며 말했다. 강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이제 겨우 저녁 여덟 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어디서 이렇게 많이 술을 마시고 온 것일까, 하고 나는 찌푸려지려고 하는 표정을 애써 붙잡으며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사과를 해야 했다. „아, 미안해요. 일행분이 어디 앉아있나 봤어요“

    „나참, 님 완전 초짜네요. 바는 원래 혼자 오는 거예요. 그쪽도 혼자 왔길래 뭔갈 좀 아나보다, 바의 정도를 걷고 있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고 옆에 앉아봤더니만, 같이 올 사람이 없어서 혼자 온 거에요?“ 이 여자, 처음 본 사람에게 꽤나 무례한 말을 꽤나 뻔뻔한 얼굴로 태연스럽게 말한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바텐더가 부시밀 한 잔을 트레이에 올려서 들고 와서는, 이 곳에 앉으실 거냐고 물었다. 숏컷의 여자는 전혀 고민하지 않고 아니요, 하고 대답한 다음에 벌떡 일어나서 바텐더가 일하는 곳 쪽의 바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러면 그렇지. 이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아니다. 주인공은 여자에게 인기가 있지 않다. 모험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를 다 마시고는, 바에 가서 계산을 했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숏컷의 여자를 봤지만, 그녀는 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자신의 부시밀과 친밀한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내가 다시 그 바에 간 것은 한 달쯤 뒤였다. 두어 번 정도 위스키나 칵테일이 마시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내키지 않았다. 바에 간다면 나는 그 숏컷의 여자를 다시 만날 것만 같았고, 그래서 꺼려졌다. 나는 그 여자의 무례함에 마음이 좀 상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지금 자신이 왕십리 근처라며, 아는 바 있으면 한 잔 하자고 갑자기 아는 동생이  전화를 해 왔을 때, 그 바 말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른 바가 없었다. 결국 나는 동생에게 주소를 찍어주고, 츄리닝 차림에 카디건을 걸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바로 향했다.


웬일로 바에는 손님이 두 명 있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마주 앉지 않고 옆자리에 붙어 앉아있는 것이 아마도 커플인가 싶을 정도로 사이가 좋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그 둘 중 여자가, 한 달 전에 나에게 바에는 혼자 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그 숏컷의 여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더 신경을 쓴 듯한, 다른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확실히 그 사람이었다.  

„ 형, 벌써 와 있었네?“  하고 갑자기 바 입구 쪽에 서 있는 내 뒤에서 큰 소리로 동생이 말을 걸었다.  그 바람에 바에 앉아있었던 두 명이 고개를 들어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다시 바로 시선을 거두었지만, 나는 숏컷 여자의 눈이 흔들리며 조금 더 오래 나를 바라보는 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분명히 나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당황해하고 있다.

    나와 동생은 바의 한쪽 끝 자리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동생은 잭콕을 한 잔, 그리고 나는 부시밀 한잔을, 얼음 없이 입구가 좁아지는 단에 달라고 했다. 또박또박, 바 저쪽에 앉은 두 명에게까지 선명하게 들릴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나의 의도를 숏컷의 여자는 분명히 눈치챘으리라. 복수의 기회는 내게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것이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동생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자신의 연애 상담을 위해서였다. 나보다 키가 크고 단단한 체형에, 얼굴도 준수하게 생긴 이 친구는 나와는 다르게 늘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왠지 이 친구는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망설이거나, 알 수 없는 부담감에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버렸다. 나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게, 형, 왠지 저한테는 진짜 쉽지 않아요.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게 처음에는 즐겁고 좋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즐거움보다는 부담이 더 커져요. 그러니까 음, 지금은 이렇게 좋은데, 싸우게 되면 어떻게 하지? 이 사람이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지? 이 사람에게 다른 더 잘생긴 남자가 생기면 어떻게 하지? 혹은 내가 이 사람보다 더 예쁜 여자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하지? 어느 날 갑자기 이 사람이 연락을 끊고 잠수해 버리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들이 끝도 없이 떠오른다구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세요?“

    벌써 다섯 번도 넘게 들어본 말들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얼굴이 잘생기지도, 몸이 탄탄하지도 않은 나로서는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잃을 걱정은 일단 가진 다음에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힘듦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나는 계속 저쪽 바에 앉은 두 명을 힐끔거렸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앉아서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고 있었다. 가끔씩 작게 웃음도 터져 나왔다. 사귀고 있거나, 아니면 사귐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사람들 특유의 달콤한 긴장 같은 것들이 분명하게 발산되고 있었다. 남자는 몸에 잘 맞는 남색 정장에 안에는 쥐색 버튼다운 셔츠를 입고 있었다. 캐주얼하고 단순한 하얀 스니커즈를 신은 발이 가끔씩 들썩거렸다. 머리는 가르마를 타서 포마드를 발라 고정시켰다. 깔끔한 얼굴 위에 끊임없이 웃음기가 어렸다.  숏커트의 여자는 검은색의 목까지 올라오는 니트에 연청색 스키니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 세진 않았지만 화장도 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들이 마시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남자는 마티니, 여자는 아마도 깔루아 밀크인 것 같았다. 허, 마티니라니. 자기가 무슨 제임스 본드라도 되는 줄 아는 걸까? 어디서 본 건 있나 본데 솔직히 맛을 좋아해서 마티니를 시키는 사람을 나는 지금까지 만나본 적이 없다. 그것보다 더 어이없는 것은 숏컷 여자가 마시고 있는 깔루아 밀크였다. 혼자 바에 와서 위스키를 샷으로 시키는 사람이, 남자랑 같이 바에 와서는 그저 달 뿐인 깔루아 밀크를 시키다니.

    잠깐 전화를 받으러 나갔던 동생이 다시 들어와서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죠, 형? 저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동생의 얼굴에서 나는 미묘하지만 들떠있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어느 한 명의 여자에게서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형 그럼 또 뵈어요!” 하며 동생이 급하게 옷을 걸쳐 입고 사라진다. 그래서 바에는 이제 나와 숏컷의 여자, 그리고 그녀와 함께 온 남자, 그리고 공부를 잘하게 생긴 바텐더 이렇게 넷이 남았다. 빈 샷잔을 괜히 이리저리 돌려보며 나는, 부시밀 한 잔을 더 시킬까 생각해보았지만, 이제는 왠지 숏컷여자를 놀리고 싶은 마음도 더 들지 않아서 바텐더에게 계산을 해달라고 했다. 동생은 자신의 술값을 내지 않고 나갔다. 함께 계산을 하면서 나는 힐끔 바의 저편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숏컷 여자는 처음에는 자신을 신경 쓰는 듯했으나, 지금은 남자와의 대화에 푹 빠져서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편의점에 들러서 칭다오, 아스텔라, 코젤, 필스너 우르켈 네 캔을 샀다. 


일주일쯤 뒤에, 내가 그 바를 방문했을 때에는 숏컷의 여자가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스니커즈에 청바지, 후드티를 입고서. 샷잔에는 금색의 위스키가 조금 남아있었는데 아마 부시밀인 듯했다. 나는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고 오는 길에 가볍게 한 잔 하고 들렸었는데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라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당황할 것도 없었다. 나는 바로 걸어가서, 숏컷 여자가 앉은 곳에서 왼쪽으로 세 칸을 띄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제임슨을 한 잔 주문했다. 

“왔네요” 하고 숏컷의 여자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린 뒤에 사무적인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왔습니다”하고 나 역시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제임슨 나왔습니다” 하고 바텐더 역시 사무적으로 말했다.


바에서는 분명히 여러 번 들어봤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클래식 노래가 흘러나왔다.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나는 노래를 들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러운 향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센 술이었다. 목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알콜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일랜드 위스키를 좋아해요?” 하고 숏컷의 여자가 물었다.  “딱히 그렇진 않습니다” 하고 내가 답했다.

“하지만 아일랜드 위스키만 시키시는걸요” 하고 숏컷의 여자가 물었다.

“왜냐면 처음에 그쪽이...”하고 무심결에 대답하던 나는 숏컷의 눈이 갑자기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나, 잘못 대답한 것은 아닐까?

“내가 저어번에 부시밀을 마시는 걸 보고 그쪽도 저번에 같은 걸 시켰단 말이죠?”하고 숏컷의 여자가 한 칸 나를 향해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아니 뭐… “

“그리고 오늘은 부시밀과 같은 아일랜드 위스키인 제임슨을 시켰다는 거죠?” 한 칸 더 다가오며 숏컷의 여자가 말했다. 

“아니 그니깐...”

“그러니까 내가 그쪽 신경을 좀 써 달라고, 시위한 거네요?” 하고 한 칸 더 다가오며 숏컷의 여자가 말했다. 이 여자는 이제 바로 내 옆자리에 와 있었다. 오늘은 술냄새가 나지 않았다. 당황한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자니 숏컷의 여자가 안됬다는 표정을 짓는다. “오늘은 나 하지만 글렌모린지를 마시고 있는걸요. 알죠? 스코틀랜드 위스키”

왠지 자꾸 놀림만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갑자기 욱했다. 그래서 반격을 시도했다. “그렇게 위스키를 좋아하시는 분이 저번주에 깔루아 밀크는 뭡니까? 남자랑 있으면 좋아하는 술의 종류도 바뀌나요?”

“깔루아 밀크가 뭐가 어때서요. 그리고 저는 모든 술에 평등합니다. 알콜이 들어있기만 하면, 무알콜 맥주나 무알콜 칵테일만 아니라면 저에게 종류는 중요하지 않아요. “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더 강력한 한 수가 남아있었다.

“바의 정도는 혼자 오는 거라더니, 저번에 일은 어떻게 된 건가요? 누구랑 같이 오셨던데?” 하고 나는 최대한 얄미운 톤으로 물어봤다. 이 공격은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숏컷의 여자는 잠시 동안 말이 없이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금세 그녀의 얼굴에 다시 장난기가 어린 웃음이 번졌다. 

“뭐야 이거 질투구나? 내가 다른 남자랑 같이 바에 와서 질투하는 거지 지금?” 

„아니, 질투라니요, 그게 아니라..“

„뭘 맞네, 내 말이 맞아. 고작 한 두 번 본 사람한테 질투라니, 너 완전 금사빠구나?“ 

„이보세요!“ 하고 나는 좀 화난 말투로 말했다. „예의가 정말 너무 없으시네요. 은근슬쩍 말도 놓으시고. 질투라니요, 제가 왜 그쪽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너무 제멋대로시잖아요. 저는 그런 사람 관심 없습니다. „ 

숏컷 여자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오물거리다가, 이내 말을 안 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를 한 칸 옆으로 이동해서 앉은 다음에 얼마 남지 않은 글렌 리벳을 홀짝 마셨다. 나도 제임슨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어느새 노래는 클래식에서 재즈로 바뀌어 있었다. 트럼펫인가 트롬본인가 하는 악기가 드럼 박자를 무시하고 자유롭게 리듬을 가지고 놀았다.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역시 어떤 곡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역시 나는 무라키상과는 다르다. 무라키상이라면 바에서 나오는 노래들의 이름을 다 알고, 연주자들의 이름도 다 알고, 꽤 전문적인 코멘트도 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저 숏컷의 여자가 갑자기 다가와 뜬금없는 시비를 걸어도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쿨하게, 위트 있게 대답했을 것이었다. 무라키 상에게는, 오늘 밤에 저 숏컷의 여자와 섹스를 해도 전혀 이상한 전개가 아닐 것이었다. 그에게는 어쩌면 숏컷의 여자가 이미 결혼을 했다는 식의 전개가 더 자연스러웠을 수도 있다. 


„여기요, 툴라모어 한잔이요.“  하고 정적을 깨고 숏컷의 여자가 바텐더에게 말했다.  역시 아이리쉬 위스키였다.  바텐더가 술을 꺼내고는 이어서 잔을 하나 꺼냈다. 그걸 보던 여자가 „아, 한잔 더 주세요“ 하고 말을 덧붙였다.

바 위에 놓은 입구가 모이는 얇은 두 잔의 유리잔에, 금색의 툴라모어 위스키가 담겼다. 내 잔도 이미 비었고, 나도 한 잔을 더 마시려고 하던 참이었다. 기분이 나빴으나, 그렇다고 저번처럼 도망치듯 바를 빠져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슨 술을 시켜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내가 깔루아 밀크를 시킨다면, 그것은 분명히 숏컷 여자를 도발하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리라. 그렇다면 아이리쉬 위스키를 시킨다면 숏컷 여자에게 유화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것일까? 그렇다면 아일리쉬 위스키와 라이벌인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시킨다면?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버번 위스키를 주문하는 것이 제일 안전한 선택일 수 도 있었다. 

    위스키 두 잔을 따른 바텐더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숏컷의 여자에게 물었다. "한 잔은 신사분께 드리면 될까요?"

"역시, 눈치가 있으시네요" 하고 숏컷의 여자가 말했다. 어리둥절한 채로  나는  툴라모어 한 잔을 받게 되었다. 

"아시겠지만, 이것도 아일랜드 위스키에요." 하고 한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숏컷의 여자가 말했다. 

"네, 알고 있어요"

"제임슨이 제일 유명하고, 부시밀도 좋지만, 아일리쉬 위스키 중에서는 저는 이걸 제일 좋아해요."

"그렇군요. 저는 마셔본 적이 없어요"

"정말? 아니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위스키를 안마셔봤을 수가 있나요? 뭐 좋아. 오늘 마셔 보면 되니깐요." 숏컷의 여자가 다시 자리를 옮겨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건배를 하고, 코로 향을 맡은 다음에, 한 모금을 들이켜 입안에서 공을 굴리듯 굴려요. 삼키는 것을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아 잠깐만! 건배를 하기 전에 하나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게 있는데, 이 잔은 제가 사과의 의미로 사드리는 게 아니에요. 저는 사과를 할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으니까. 이 잔은 그러니까, 아직 진정한 아이리시 위스키를 마셔보지 못한 당신이 딱해서, 그래서 제가 내려드리는 성은 같은 거라고 치죠. "

잔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 여자와 사귀게 될 남자는 꽤나 고생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스키는 역시 훌륭했다. 부시밀보다 훈연 향이 더 약했고, 달콤한 맛이 더 강했다. 재즈가 끝나고 클래식 노래가 시작됐다. 라흐마니로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바에서 아는 노래가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왠지 내가 조금 더 무라키 상에 가까워진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모험은 언제 시작하느냐고? 글쎄, 세상에서 연애만큼 더 위험하고 스릴 있고 다이내믹한 모험이 더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기다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