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효창 응봉 최중원 Mar 21. 2020

혼잣말들

카페에 들어온 사람은 다섯. 모두 고등학교 동창이다. 각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문한 다음, 서로 앉아서 대화를 시작한다.


„너희들 내 시어머니 이야기 예전에도 들었지. 여기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두 명 있지만, 미혼으로 남지 않는 이상 곧 이게 너희들의 미래가 될 테니까 잘 들어봐. 알다시피 어머님이 좀 왕짜증이거든. 아니 그 나이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춤을 배우러 다니시는 거야. 동네 커뮤니티 센터에서 말이야. 왜 그런 거 있잖아. 탱고니 차차니 그런 스포츠 댄스. 그런데 나 보고도 같이 듣자고 하시지 뭐야? 처음에는 티 내진 않았지만 완전 질색했지. 내가 왜 그런 노땅들하고 여기저기 흔들어대고 빙글빙글 돌고 그래야 하냐고. 그런데 내가 저녁에 어머님 모시러 한번 차를 몰고 갔었는데, 와, 어머님과 함께 몸이 단단하고 수트 핏이 좋은 젊은 남자들이 잔뜩 나오는 거야. 왜, 어머님 집이 여의도거든. 바로 길 건너편에 금융회사들 본사들이 막 서 있다구. 그런 데서 펀드매니저이니 회계사니 하는 사람들이 낮에는 수트 입고 사무실에 앉아서 돈을 굴리다가 저녁이 되면 퇴근하고 나서 커뮤니티센터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는 춤을 배우는 거야. 엄청 멋있지 않니? 내가 그래서 어머님을 모시고 가면서 물어봤지. 같이 춤을 배우는 사람들 어떠냐고. 그랬더니 완전 얄밉게도, 늙은이들밖에 없어서 흥미가 떨어진다고 하는 것 아니겠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내가 어머님이랑 같이 그 반에 들어가면 관심이 다 나에게 쏠릴 게 뻔하니까 그 꼴 보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왜 저번에는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오빠 핸드폰으로 보더니, 그리 많지도 않은 팔로워 보고 뭐라 하는 거 아니겠어? 내가 뭐 인스타에 비키니 사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운동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 몇 개 올렸다고 남사스럽다고, 그 모습을 오만 명에게 꼭 보여야겠냐고 막 뭐라 하지 뭐야.  아니 그럴 거면 처음에는 왜 수업 같이 듣자고 했냐고. “


„그쪽 어머님은 그 정도면 완전 귀여우시네. 나는 내 장인 어르신 때문에 정말 미치겠다. 왜 내가 요즘 MBA 다니고 있는 거 알잖아. 그렇지 않아도 빡센 금융회사 다니면서 저녁에 주말에 대학원 수업 듣느라 진짜 힘든데, 저번에 장인 장모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러더라구. 연세대 MBA를 굳이 왜 다니냐고, 하버드나 예일도 아닌데. 아니 그게 지금 내가 사드리는 5코스짜리 프랑스 요리를 먹으면서 할 소리야? 미쉘린 별 2개 받은 청담동의 레스토랑이었다고. 넷이서 먹는 금액이 와인 제외하고 60만 원이 넘었어 그때. 장인 장모님 결혼기념일이었거든. 장인 어르신이 예일대 나오신 건 그래, 인정하는데, 경영학도 아니고 경제학을, 그것도 박사도 아니고 석사까지밖에 안 하셨다고. 한국 돌아오셔도 끈이 어찌어찌 닿아서 금융권 중에서도 완전 철밥통으로 유명한 농협에서 정년까지 꽉 채우시고는, 지금은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연금 따박따박, 어디 강남 건물 두 채에서 월세 또 따박따박 받는 것 빼고는 하는 일도 없으면서 아니 무슨 참견이야. 나 정말. 아니 연대 MBA가 어때서? 요즘엔 등록금도 어디 아이비리그 뺨칠 만큼 비싸. 그리고 지금 같이 다니는 동우들도 하나같이 잘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이번에 정기 인사에서 삼성전자 임원으로 발탁된 사람도 한 명 있고, 다른 한 명은 외국계 광고회사의 한국 지사 사장이고. 아니 정말 세상이 바뀐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아이비리그 타령이야.  나 저번에는 추석인가 암튼 어느 명절날에 장인이 장모님과 내 이야기하는 것을 얼핏 들었는데, 우리 학교가 무슨 국제 대학 랭킹에서 100위안에도 못 들었다고. 아니 진짜요? 진심으로요? 장인 어르신, 그쪽 따님이 나온 학교는 몇 위인지 찾아는 보셨나요? 완전 속물이야. 내가 지금 회사 내 내 직급 중에 실적이 제일 좋고 돈도 제일 잘 벌고, 하루에도 두세 통씩 헤드 헌터의 메일과 전화를 받는데, 아버님 앞에만 서면 완전 무시받는다니깐? 서재에 그렇게 꽉 차있는 온갖 책들도 다 장식품일 거야. 그중에 읽어본 책 10분의 1도 안 될걸? “


„너희들 이야기 들으니까 내가 아직 결혼 안 한 게 정말 다행이다. 그런 꼴 보면서 결혼들은 그러게 왜 하니. 행복하긴 해? 파트너들이랑 잘 지내? 뭐, 결혼 한 이상 잘 지내야지 어쩌겠어. 이혼이라도 하기 전에는 적어도 말로라도 잘 지낸다고 해야지. 그렇지 않아? 아, 이거? 나 저번에 새로 한 타투야. 어때, 무슨 모양인지 알아보겠어? 모르겠지? 사실 팔 말고 여기저기 좀 더 받긴 했는데, 보여주긴 좀 그렇다. 내가 저번에 베를린 살 때 받았어. 작년 모임 때는 내가 못 왔었잖아. 그때 베를린에 있었거든. 왜 요즘은 다들 제주도다 강릉이다 한 달 살기 하잖아. 그런데 한국이야 한 달 살면 어느 정도 그 동네에 익숙해지고 하지만 유럽 어느 도시에 한 달 사는 것은 좀 다르잖아. 문화도 다르고 사람들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그래서 나는 모은 돈으로 딱 일 년 살아보겠다 하고 베를린에 간 거였거든. 아무 계획도 없이, 아는 사람도 하나 없이. 그냥 무작정 갔지 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들고서. 고생을 좀 해서 어느 베게에 들어갔는데, 아 베게가 뭔지 모르겠구나. 그니까 셰어하우스 같은 거야. 부엌과 화장실, 거실을 같이 쓰고 침실은 각자 따로 있는. 뭐 남자 셋 여자 셋 같은 거라 생각하면 될 거야. 거기에 로맨스가 있냐 뭐 그런 게 궁금할 것 같은데, 너무 프라이빗한 이야기는 내가 하지 않을게. 하지만 베를린은, 공기가 달라. 정말로 시원하고 깨끗해. 사람들은 저마다 너무 자유롭게 살고, 옷 입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시간이 흘러가는 게 다르다니깐? 상상해봐.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서 샤워하고 대충 말린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나서 부엌에서 빵에 아보카도랑 계란 프라이를 곁들여서 커피랑 함께 홀짝. 라디오를 틀어놓는 게 중요해.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외국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구. 그다음엔 천천히 옷을 입고는, 공원이나, 슈프레 강변이나, 동네 카페 같은 곳으로 나가는 거지. 금요일 밤에는 클럽에도 다니고. 클럽에서 누구를 건지든 못 건지든, 지하철을 타고 새벽에 내 숙소로 돌아오다 보면 아 진짜 자유가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팍 와. 한국에서의 삶은 너무나 신경 쓸게 많구나. 다른 사람들 눈치도 보고, 해야 할 것도 하면 안 될 것도 많고. 어느 나이쯤엔 어떤 것을 이뤄야 하고 가져야 하고. 베를리너들이라고 뭐 그런 사회적 압박이 아예 없을까만은, 그래도 태도가 훨씬 쿨해.  흐르는 물처럼 자유로워. 말을 하면 할수록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가고 싶어 지네. 아, 그리고 너희들한테만 이야기해주는 건데, 나에게 이 타투를 해준 타투이스트, 지금 나랑 같이 한국에 왔다? 우리 사실 사귀고 있거든"


„너희는 그래도 다 즐겁게 사는 것 같다. 나는 요즘 고민이 있어. 우리 애가 이제 5살인데, 다니는 학원에서 무슨 테스트를 받아보라고 그랬거든. 아무 생각 없이 보냈더니 나중에 학원 원장에게 전화가 오지 뭐니. 글쎄 아이가 무슨 수치가 엄청 높다고. 다른 말로는 영재라고. 영재에게 그냥 일반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은 거의 전 인류에 대한 범죄라나 뭐라나. 아, 오해는 하지 마, 이거 지금 내가 자랑하는 게 아니야. 난 정말 고민이라고. 물론 내 아이가 종종 엄청 똑똑해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내가 이야기를 해 봤더니 모든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이 다 비슷하게 느끼는 모양이더라고. 내 아이는 남들과는 달리 특별한 구석이 있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나 봐. 그런데 내 아이는 그게 사실로 밝혀진 경우인 거지. 그런데 이게 또, 영재 교육기관에 보내면, 그 학교에 있는 모두가 영재들일 거잖아? 내 아이가 그냥 일반 학교에 다니면 당연히 전교 1등을 하며 자신감 있게 자라겠지만, 영재학교에 가서 반에서 2등, 3등밖에 못하면 그게 또 얼마나 스트레스겠어. 그런데 또 아이가 영어 하는 거 보면, 분명히 이게 소질이 있거든. 저번에는 미국에서 유학 중인 삼촌이 방학 때 잠깐 한국에 들어왔는데, 삼촌 영어 하는 거 듣더니, 발음이 너무 별로라 고하는 것 있지? 그리고 몇 단어를 해 보는데, 아 물론 영국식 영어로 말이야. 휴 그때 삼촌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너희들이 봤어야 하는데 말이야. 아무튼 난 그래서 고민이야. 우리 아내는 좀 걱정을 하더라고. 어디서 영재 소리 듣는 사람들 중에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냐고. 티브이에 나온 무슨 신동들 다 대학교까지는 엄청 빠르게 들어가지만, 장기적으로 그 명성이며 실력을 오래 유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인류에 죄 좀 짓고 좀 더 보통인 사람들과 함께 자라면서 배우는 게 더 좋은 게 아니겠냐고. 글쎄, 아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긴 한데, 그래도 우리끼리 말해서 솔직히 내 아이가 똑똑하다는데, 당연히 부모로서는 그 똑똑함을 최대한으로 발현시킬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닐까? 앗 참, 한 가지만 더. 우리 애가 눈치도 엄청 빨라가지고, 나랑 아내가 아이 앞에서는 이런 영재의 이응자도 꺼낸 적이 없었는데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나에게 와서 물어보더라고. 영재가 뭐냐고. 그래서 내가 무엇이든 조금 더 빨리 배우는 사람이라고 그랬더니, 그럼 난 영재네? 하고는 다시 거실로 뛰어가더라고. 정말 영재이긴 한가 봐. “


„너희들 고민이 많아도 다 좋아 보인다. 다들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나를 봐봐. 창업한 지 3년인데 도저히 끝이 안 보여.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다 그렇겠지만, 앙트레프레너쉽, 아 한국어로 기업가 정신, 이거만 가지고 버티기엔 너무 힘든 싸움이야. 내가 영화관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뭔 줄 알아? 매드 맥스라니깐. 드라마도 못 보고, 여행도 못 가고, 누구 만나지도 못하고 맨날 덥수룩한 수염이나 체크남방의 사람들과 어디 골방에 틀어박혀서 컴퓨터만 보고 회의만 하고. 이게 뭐냐 진짜. 저번 달에야 겨우 시리즈 C 투자를 받았어. 아, 그게 뭐냐면, A, B, C 통상 이렇게 구분하거든. 시리즈 C면 꽤 많이 온 편이야. 투자자들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인정도 받은 셈이고. 우리 회사가 나름 기술력으로 인정을 받거든. 서비스도 시장에서 먹힐만하다는 소리 많이 들었고. 너희가 봤는지 모르겠지만 저번에 청와대에서 벤처 간담회 할 때 나도 초청받았거든. 대통령이랑 밥도 같이 먹고 사진도 찍고. 내가 한 농담에 엄청 웃으셨다니깐. 그 기사가 나간 다음에 연락을 많이 받았지. 그런데 이게 또 고민이야. 갑자기 어느 회사에서 연락이 왔거든. 비밀유지계약 때문에 말할 수 없지만, 본사가 미국 LA에 있는, 엄청 유명한, 너희들도 다 아는 그 회사. 그 회사의 아태지역 지사 지사장이 직접 나를 만나서, 회사를 인수하고 싶다는 것 아니겠어? 금액도 너희가 들으면 깜짝 놀랄 거야. 지금까지 투자받았던 돈들을 다 갚고, 어디 스페인 어딘가에서 성 하나 사서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만큼의 금액이야. 그런데 뭘 망설이냐고? 그게 또 결정이 쉽지가 않아. 앙트레프레너쉽, 그러니까 기업가 정신. 이거 내가 완전 콧방귀를 뀌었던 건데, 이게 또 막상 팔려니까 괜한 책임감이 생기더라고. 우리 회사가 다국적 대기업에 팔리고 나서도 지금처럼 창의적인 조직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상황이 바뀌면 모회사가 우리 회사를 헌신짝처럼 버릴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무엇보다 이 분야에서 우리 말고 두각을 나타내는 한국 회사가 하나도 없는데, 우리마저 돈을 보고 미국 대기업에 회사를 팔아버리면 한국의 다른 스타트업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내가 돈을 벌려고 스타트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거든. 잘할 수 있는 걸로 한국을,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꿔보자. 어차피 외국에서 시작된 변화의 물결이 언젠가는 한국으로 들이닥칠 텐데, 그전에 능력 있는 한국산 서비스를 만들어보자. 그런데 눈 앞에 이런 어마어마한 조건이 적힌 콘트랙트가, 아 그러니까 계약서가 딱 제시되니까, 마음이 흔들리더라고. 휴,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했는지 모르겠다. 너희들에겐 이해하기 좀 어려운 내용일 텐데. 사실 결정은 이미 내렸어. 방금 이야기를 끝내고 온 참이야. 아직 비밀유지계약 때문에 말할 수 없지만.  아마도 내일쯤 신문에서 기사로 볼 수 있을 거야. „


이야기를 마친 다섯은, 다음에 또 만나자며 서로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와 각자 갈 길을 간다.

작가의 이전글 공간들에 대하여 : 커피 커넥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