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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창 응봉 최중원 Jul 03. 2020

211호

작은 유리잔에 담긴 술을 털어 넣고 K가 말했다.  

내가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술자리의 분위기는 끓었다 식은 죽처럼 퍼져있었다. 여기저기서 작은 대화가 뜨문뜨문 이어졌다. 지루하게 첫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재촉하는 눈빛으로 K를 바라보았다. K는 얼마 전에 헤어졌는데, 아무에게도 그 사정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었다. 


얼마 전에 혼자 외국으로 여행을 갔었을 때의 일이야.  원래는 혼자 갈게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무르기에는 내야 할 위약금이 좀 컸거든. 열명 정도의 그룹을 모아서 가이드와 함께 작은 도시 세 곳을 돌아다니는 열흘짜리 일정이었는데, 내내 2인실 방을 혼자 썼지. 2인실을 1인실로 바꾸는 데 드는 돈이 2인실과 1인실의 가격차보다 더 많이 들더라구. 


도시들은 작고 예뻤어. 다들 산 중턱에 있었거든. 땡볕 아래서 꼭대기의 전망이 잘 보이는 포인트까지 올라가는 것이 항상 힘들었지만, 올라가면 달력 사진에서나 본 적이 있었던 풍경이 있더라. 그렇지만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어. 음식도 맛이 없었고. 무엇보다 혼자서, 아무 말 없이 가이드가 높게 들고 다니는 보라색 양산만을 따라다니는 그런 여행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거든. 


첫 번째 도시에서의 첫 밤에, 내가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벨이 울리더라. 문 밖에는 어떤 여자 한 명이 서 있었어. 같이 여행하는 열 명중에 한 명이었지. 


오, 뭐야 뭐야, 재미있는 이야기 하고 있잖아? 옆에서 풀린 눈으로 안주를 주워 먹던 L이 자리를 바싹 붙여 앉으면서 말했다.


들어봐.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뭐 망상 같은 거 있잖아. 여행지에서의 로맨스. 비포 선셋 비포 선라이즈. 어차피 같이 오기로 했던 사람이랑도, 뭐 그렇게 됐겠다. 방에는 비어있는 침대도 하나 있겠다.


그 사람이 말을 하더라. 호텔 로비에서 키를 나눠줄 때 그쪽분께서 더블룸에서 혼자 묵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이런 부탁이 너무 실례인 것은 알지만, 혹시 자기 아버지가 이 방에서 함께 자도 되냐고. 자신은 부모님이랑 함께 여행을 왔는데 여행사에서 실수로 패밀리 룸을 더블룸으로 예약하는 바람에 방에 침대가 하나 부족하대. 


가이드에게 말해보셨냐고 물어봤더니, 그랬다고 하더라. 가이드가 리셉션에 내려갔다 오더니 성수기라서 호텔에 빈방이 로열 스위트, 그러니까 제일 비싼 방 하나밖에 없고, 간이침대도 다 나갔다고, 정말 죄송하다며 어쩔 바를 몰라했대.


호텔 싱글 침대가 그렇게 좁은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한 침대에서 주무시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물어봤더니, 말을 머뭇거리다가, 사실은 부모님이 사이가 너무 안 좋다고, 그래서 두 사람 다 한 침대에서 자는 것을 너무 싫어한대. 자기가 부모님의 사이를 좋게 만들어 보려고 어렵게 어렵게 이 여행을 성사시켰는데, 이런 일이 터지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 그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나는 갑자기 그 사람의 아버지와 방을 같이 쓰게 되었어. 그 아버지는 키가 작고 약간 통통한 사람이 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한 시간씩 하는, 과하게 깔끔을 떠는 사람이었지. 잘 때는 죽은 듯이 조용해서 설마 정말 죽은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었어. 방을 혼자 쓰는 것보다는 여러모로 불편했지만, 뭐 어쩌겠어, 하는 생각으로 있었지. 그러면서 우리는 두 번째 도시로 옮겨서, 전망이 좋은 포인트에 올라가고, 전통음식을 먹고, 전통 춤 공연을 보고, 기념품 샵에 들르고, 교회와 박물관을 거친 다음, 세 번째 도시로 옮겨가서 똑같은 것을 반복했어.


나도 그 사람도 서로 낯을 잘 가려서, 처음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도시의 호텔 방에 짐을 풀었을 때는 그래도 맥주의 힘을 빌려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어. 왜 그런 거 있잖아. 지금이 금에 투자해야 할 시기라던지, 허벅지 두께가 1cm 줄어들 때마다 수명이 1년씩 줄어드니 스쿼트를 해야 한다던지, 

작두콩이라는 엄청 큰 콩이 있는데 그 가루가 그렇게 몸에 좋다던지. 주로 나는 듣기만 했지만 말이야.


그 여자분은, 어떤 신묘한 묘기를 부린 건지 모르겠지만, 여행 중에 멀어졌던 부모님의 사이를 다시 가깝게 좁히는 데 성공했어. 분명히 여행을 시작했을 때에는 거의 남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서 걷던 어머님과 아버님이 여행이 끝나갈 무렵에는 그냥 딱 붙어서 걷더라니까. 노하우를 전수받아서 멀어진 부부 사이의 금슬을 다시 좋게 만들어주는 상담소 같은 거라도 차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구.


그리고 마지막 날 호텔 근처의 중국식당에서, 제대로 한번 먹어본 적 없이 유튜브만 보고 처음 만들어본 게 분명한 김치와 잡채, 김밥과 불고기를 먹는 자리에서 나는 그 가족들과 합석해서 밥을 먹게 되었어. 다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더라고. 어머님은 자꾸 내 접시에 불고기를 덜어주시고 아버님은 내 잔에 소주를 계속 채워주셨지. 


호텔에 도착해서 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잠깐 근처를 한 바퀴 돌았어. 저렴한 호텔이었기에 언덕 위작고 예쁜 구시가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 계획 따윈 없이 되는대로 길을 내고 건물을 올린 우중충한 신시가지에 있었지. 날은 어둡고, 길과 간판들과 사람들은 낯설고, 아무튼 밤 산책을 하기에 그렇게 좋은 동네는 아니었지만, 왠지 계속 걷고 싶었어. 왠지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면 그렇게 제일 센티해지는 거잖아?


걸으면서 생각했지. 우리가 왜 헤어져야 했었나. 내가 차인 건가 내가 찬 건가. 뭐 그런 쓸데없고 답 없는 것들 말이야. 함께 여행에 왔었다면 우리가 같이 했었을 것들, 함께 먹었을 호텔 조식들, 함께 걸었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이름을 가진 길들.  낯선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잔뜩 등장하는, 호텔 벽에 달려있는 화면이 평평하지 않은 티브이를 함께 돌려보았을 밤들. 그 대신 나는 어제저녁 호텔 방에서 어떤 아저씨와 함께 스쿼트를 50개 하고, 덕분에 하루 정도 늘었을 수명을 미니바에서 꺼낸 맥주를 함께 마시면서 다시 줄였어. 그리고 그놈의 몸에 좋다는 작두콩 생각이 자꾸 떠올라서 센티함을 날려버리더라고. 



산책을 마치고 211호 내 방의 문을 카드키로 열고 들어왔는데, 내 옆 침대에 아버님 대신 그 여자분이 앉아계시더라. 그분이 정말 당황해하며 말했어. 

„ 아, 저, 엄마 아빠가 사이가 다시 좋아지셨어요. “

„ 아… 네.. 잘 됐군요. 그런데 왜…“

„ 그런데 사이가 너무 좋아지신 것 같아요. 제가 있기가 좀 뭐할 정도로 “



K 주변엔 어느새 너 댓 명의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모두가 의외의 전개에 놀란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하고 L이 다그쳤다. 그 방에서 같이 잔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가이드가 혼자 쓰던 방으로 갔지. 가이드하시는 분이 여자셨거든. 나랑 아버님이 쓰던 방을 그 따님과 가이드분이 쓰시고. 가이드가 나에게 부탁하려고 전화를 했었는데, 내가 못 받았더라고. K가 웬 호들갑이냐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 뭐야, 이야기는 그게 끝이야? L이  더 스펙터클한 무엇인가를 기대라도 했다는 듯이 물었다. 


그치 뭐. 그다음엔 비행기 타고 잘 돌아왔지. 끝. 


모여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불평을 내뱉고는 다시 자신이 왔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봤다. 첫차 시간까지는 이제 사십 분 정도 남았다. 


야, 하고 K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거 좀 먹어볼래?

K가 나에게 내민 것은 커피믹스처럼 생긴 작은 파우치였다. 파우치 겉면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어디 건강원 같은 곳에서 요즘에는 이렇게도 만들어주는 모양이었다.


이게 뭐야? 

먹어봐. 작두콩 가루야. 몸에 정말 좋은 거래. 만날 때마다 자꾸 줘, 열개 스무개씩. 아버님이 나에게 전해주라고 하셨다면서. 


나는 핸드폰 시계를 다시 바라보았다. 첫차까지는 이제 30분. 시간이 모자랄까 걱정하면서 나는 재촉하는 눈빛으로 다시 K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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