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라이프 5화. 알을 깨고 나오는 K-토박이
가끔 미디어에서 타일러 라쉬나 다니엘 린데만 같은 주한 외국인이 나보다 한국에 대해 더 잘 아는 모습을 보면 너무 신기했다. 그런데 내가 해외에 나와보니 그 이유를 알 것만도 같다. (물론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그들의 '넘사벽' 두뇌와 언어 구사 능력 등은 차치하고 글을 쓰겠다)
베를린에 와서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독일의 정치, 역사, 경제, 산업, 문화 전방위에 걸쳐 관심을 갖게 된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나는 이방인으로서 철저한 약자이자 비주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현재 어떤 분위기인지 예의주시해야 한다.
부끄럽게도 한국에서는 내가 주류에 속했기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별 관심 없어도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다고 느꼈지 싶다. 전문매체 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매일 뉴스를 마주했으나 분야가 국한돼 있기도 했고, 점점 과중되는 업무에 당장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지쳤던 듯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토록 평범한 직장인이었음에도 한국 사회에서 나는 주류였다. 밤낮없이 일하고 밥 먹듯이 야근하는 미생일지라도, 한국에서 나고 자라 유교사상과 위계질서를 뼛속까지 체득한 '토종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한민국에 완전히 소속된 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회사 내 팀장이라는 직책을 비롯해 우리 가족이 부촌에 살고 있다는 조건 등은 스스로를 애써 증명해 보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일정 부분 나에게 힘을 쥐여줬다. 강자와 약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일을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한국에선 그나마 전자에 가까웠다면 독일에서는 완벽한 후자다.
이처럼 처한 환경이 달라지고 사회적 역할과 지위가 확연히 바뀌다보니 '살아남기 위해' 세상의 흐름을 보게 된다. 독일의 역사와 문화, 정치, 경제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레 궁금증은 주변 유럽 국가들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비유럽권 국가들까지 확장된다.
"그래. 독일에 가서 견문을 넓히거라" 독일로 떠나겠다고 선전포고(?) 했던 날 저녁 아빠가 하신 말씀이다. 내색은 안했지만 솔직히 그땐 그 말이 약간 부담스러웠다. 나는 그저 독일에서 살아보고 싶을 뿐인데 왠지 더 똑똑해지고 잘나져야만 할 것 같은 중압감이 들어서다.
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내가 아빠의 말씀처럼 요즘에는 국제 정세를 공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스스로 이 사회에서 생존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에서 생겨난 변화다. 매일 매 순간 느끼고 깨닫고 배움을 얻는 중인데 차마 글이나 말로 온전히 정리할 재간이 없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기록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그것들이 너무 방대하고 깊어서이기도 하지만, 명쾌한 지식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의구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답을 알 수 없는, 아니 정답이 없는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자를 대고 칼로 자르듯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관점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서다.
예컨대 나는 독일 정치를 공부하며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정치인으로서 보여준 면모에 깊이 감명받았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그가 16년간 펼친 정책들은 독일뿐만 아니라 전세계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유럽의 병자'였던 독일을 열강 중에서도 리더로 만든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베를린에 직접 살면서 난민과 이민자 정책의 양면을 몸소 체감하는데, 현시점에서 나는 메르켈의 난민 수용 정책이 실패했다고 느끼고 있다. 물론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면 안되겠으나 내가 지켜본 바로 그들은 대다수 독일어를 사용하지도, 독일 문화를 따르지도 않는다. 독일 사회에 융화되지 않고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해 살아간다.
지금 독일에서는 유로 2024가 한창인데 튀르키예(터키) 이민자들은 튀르키예가 축구 경기를 이기는 날이면 어김없이 자동차 클락션을 밤새도록 미친듯이 울리며 도로를 폭주한다. 소음 폭격이 가히 끔찍한 수준이다. 정작 축구에 진심인 독일 사람들도 우승날 그런 난리를 피우진 않는데 말이다.
윗집에 사는 이웃은 자주 이슬람 음악을 굉장히 크게 틀어놓고 쿵쿵쿵쿵 쾅쾅쾅쾅 시간 개념 없이 시끄럽다. 종교의 자유는 존중하지만 괴상하게 흐느껴 우는 듯한 이슬람 노래와 소음이 집안 가득 울려 퍼질 때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든다. 다른 사람이 함께 산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한평생 정해진 규범을 따르고 말 잘 듣는 시민으로 살아온 탓일까, 남에게 피해주길 극도로 경계하는 동방예의지국의 유교걸 DNA 때문인 걸까.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저들은 뭔데 독일에 와서도 독일 법을 따르지 않지', '왜 독일 땅에서 위화감을 조성하는 거지'라는 불만을 품게 됐다.
이게 참 어려운 지점인데, 여기서 나의 생각이 그쳤다면 차라리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맞다. 이 규칙은 누가 정한 걸까? 이 땅이 독일의 전유물인 게 맞나?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를 약탈해 축적한 부, 세계대전 이후 다른 나라 사람들을 데려와 값싼 노동력으로 쌓아 올린 경제적 발전, 이후 탄탄대로를 달린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세계사는 독일을 비롯해 서구 유럽 열강 중심으로 흘러왔다. 나 역시 그런 서유럽 강국을 동경해 독일로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역사적으로 무자비한 지배와 착취, 불평등이 있다. 되뇌고 곱씹다보니 문득 나의 세계관이 한없이 일방적이고 편협하게 느껴졌다. 특권층이 이미 다 만들어놓은 세상에 그대로 순종하는 태도를 돌이켜본다.
무엇보다 전쟁을 일으키고 나치의 패악까지 범한 나라이기에, 메르켈 전 총리가 독일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난민을 대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이해는 된다. 이곳에 와서 알게 된 독일인 친구는 어느날 내가 소동을 피우는 일부 이민자들에게 날이 서 있자 이렇게 말했다.
"독일에서는 익숙해져야 할 부분이야. 모두가 사려 깊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나라에서 온 너에게는 확실히 큰 변화일 거야. 베를린에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해. 독일은 나치의 과거가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너도 외국인이지만 한국인들은 정말 친절하고 신중하며 적응력이 좋아."
지금 이 글에서도 그렇듯 생각이 여기저기 뿌리를 뻗자 옳고 그름의 경계가 무너졌다. 게다가 식민 지배를 겪었던 우리나라의 역사는 물론이고 튀르키예처럼 서방세계 외 국가 관점에서도 역사와 문화 등을 공부하고 나니 더더욱 세계관이 뒤흔들린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다.
대한민국 토박이로서 베를린에 산 지 한달이 됐다. 관점과 시대에 따라 가치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이분법적 잣대를 내려놓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 섣부르게 답을 내리지 않는 것. 내가 몰랐던 세상을 직접 겪어보고 이해하고 깨우치는 것. 어쩌면 이러한 변화가 통찰과 성찰 없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일 이상으로 진정 견문을 넓히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