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라이프 6화. 다정한 구원 한스푼이면 끝내주는 맛이 날 거야
7월부터 어학원을 다니고 있다. 우리반에 한국인은 나밖에 없다. 아니, 반 전체 통틀어 동양인은 내가 유일하다. 학생 대부분은 남미에서 왔고 나머지는 아랍권 또는 유럽 내 다른 나라 사람들이다.
"Guten Morgen, Momo" (좋은 아침이야, 모모)
"Momo, lies das bitte" (모모, 이거 읽어보세요)
"Tschüss, Momo!" (잘가, 모모!)
이곳에서 나의 이름은 '모모'다. 부르기 쉬워서일까 아니면 기억에 각인돼서일까. 여기저기서 다들 모모를 찾는다. 내가 모모라고 불리게 된 계기가 있다. 단순히 한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가장 큰 부분은 이러하다.
지난주 첫날 수업이 끝난 후 담임선생님께서 왓츠앱(독일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메신저)에 그룹방을 만드셨는데, 이 방에 초대되자마자 선생님과 반 친구들에게 말했다.
Könnte ich im Unterricht statt meines richtigen Namens meinen Spitznamen “Momo” verwenden? Mein richtiger Name ist “OOO”, aber wenn er auf Deutsch ausgesprochen wird, klingt er ganz anders als auf Koreanisch. Außerdem ist die Aussprache meines Namens schwierig und verwirrend, daher würde ich lieber meinen Spitznamen verwenden.
수업시간에 본명 대신 애칭인 '모모'를 사용해도 될까요? 제 본명은 OOO인데, 독일어로 발음하면 한국어와 전혀 다르게 들려서요. 발음하기도 어렵고 헷갈려서 차라리 애칭을 사용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당연히 가장 초급 코스인 내가 이런 장문의 말을 유창하게 했을리는 없다. 챗지피티와 구글 번역기의 힘을 빌려 몇번이고 수정한 뒤 나름 용기를 내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Ja klar, Momo" (응 물론이지, 모모) 그렇게 해서 수업 둘째날부터 나는 모모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나의 짝꿍은 니콜라스라고 하는 칠레 남자다. 첫날 학원 접수대 직원이 알려준 강의실 숫자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탓에 헤매다 살짝 늦게 들어갔는데, 맨 앞자리만 비어있어서 엉겁결에 같이 앉았다. 니콜라스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허둥지둥대다 교재도 못 사간 나와 책을 함께 나눠보며 "우리는 메이트"라고 말해줬다. 외국에서도 강의실 제일 앞좌석은 다들 부담스러워하는 걸까? 첫날 앉은 뒤로 쭉 고정석이 됐다. 우리는 매일 아침 맨 앞자리에 앉는다.
혼자만 아시안인 데다가 파워 내향인인 나는 니콜라스 덕분에 학원에 잘 적응하고 있다. 그는 늘 나에 관해, 또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먼저 대화를 터준다. 김치, 손흥민, 싸이, BTS, 블랙핑크, 라면, 남산타워...
그가 가르쳐준 칠레식 하이파이브도 매일 주고받는다. "헤이, 모모?" 하고 신호를 보내면 서로 손바닥을 맞대 박수를 친 뒤 주먹을 부딪친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느냐며 내게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보이기도 한다.
니콜라스는 소위 '인싸'다. 분위기 메이커에 교우관계도 좋고 선생님도 예뻐라하는, 그러면서 성적도 우수한 (학창시절 반에 한명씩은 꼭 있는) 그런 남학생 말이다. 독일에 온 지는 일년이 됐다고 한다.
모모야, 이건 한국어로 뭐야? 저건 한국어로 어떻게 말해? 우리말을 알려주면 열심히 또박또박 따라한다. 덩달아 강의실 곳곳에서는 한국을 화제 삼은 이야기들이 자주 울려퍼진다. 낯선 독일 땅에서 괜시리 뭉클해지는 순간들. 그의 따뜻한 관심이 참 고맙다.
독일인인 안드레아 담임선생님 역시 먼저 "안녕하세요"라며 한국말을 해 보이셨다. 니콜라스는 안녕이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면서 귀여운 발음으로 연신 "안녕! 안뇨옹?"하고 소리를 냈다.
오늘은 내게 독일에 친구들이 있냐고 묻길래 혼자라고, 친구가 없다고 답했다. 그는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모... 나는 친구 아니야? 우리 모두 너의 친구야" 그는 반 친구들을 향해 뒤돌아보며 말했다.
뒷자리에 앉은 안젤리카와 마링카를 비롯해 남미 출신 친구들이 뜨겁게 동의했다. 그들끼리는 서로 국적은 다를지라도 모국어가 에스파냐어로 같기에 활발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오직 나 한명을 위해 영어로 천천히 대화했고,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은 한국어로 다시 번역해 알려줬다.
그들은 한국 음식을 정말 좋아한다며 다음에 함께 요리를 해먹자고 했다. 오히려 나도 모르는 아시안 식료품 마트를 추천해 주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독일어 대신 스페인어를 배워서 남미를 가버릴까 고민될 만큼 다정한 사람들이다.
첨언하자면 단지 내게 잘해줘서가 아니라 실제로 다들 스타일도 좋고 매력적이다. 친구들은 에스파냐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이번 기회에 자기들한테 배우라며 웃어보였다. 머릿속에 오직 독일만을 그리고 온 나에게 뜻밖의 세상이 생겼다.
오늘 수업이 끝난 후 시몬이라는 친구는 자기가 직접 구워온 빵을 나눠줬다. "와, 네가 만든 빵이라고? 너무 맛있잖아! Das ist lecker!" 요즘 베이킹을 조금씩 차근차근 배우고 있다던 그의 실력은 대단했다. 무엇보다 혼자 그런 도전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나까지 고취했다.
시몬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 햇살이 기분 좋게 내리쬈다. 발걸음은 산뜻했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아, 모모의 베를린 라이프도 따뜻하고 맛있게 잘 구워지기를.
끝내주는 맛이라고 훗날 스스로 감동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