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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Jul 18. 2024

나의 모든 X들에게

독일라이프 7화. An alle meine Ex-Freunde

"사실 독일에서의 생활이 OO님 인생 시나리오에 포함돼 있었고 독일로 오게 하기 위한 입문, 촉매제가 전 남친이었어요. 때때로 필요한 일에 맞춰 그에 적당한 인물들이 내게 오는 것은 막을 수 없어요. 그냥 물 흐르는대로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면 훨씬 인생이 덜 고달파요. 더 좋은 쪽으로 흐를 뿐. 자책도 우울도 밀려들어올 때면 '또 왔구나?' 인사해주고 다시 보내주면 돼요."


"전 남친의 역할은 OO님을 독일로 데려오는 것. 거기까지 였을 거예요. 독일에서 살게된 진짜 다른 이유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힘들어도 밥 잘 챙겨먹고 새로움을 만끽하세요. 화이팅."


"아마 전 남친은 독일에서 더 좋은 인연과 삶으로 연결해주는 역할만 하는 인연일 수도 있겠죠."


며칠 전 독일에 사는 어느 한국인 유튜버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덤덤하게 찍어올린 일상 브이로그를 우연히 보게 됐다. 최대한 무덤덤해 보이려고 노력했을 뿐이지, 실제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무너져 있을지 느낄 수 있었다.


위에 적은 글들은 영상에 달린 댓글의 일부다. 내게도 큰 위로가 돼서 캡처를 해두었다. 세 댓글은 모두 일맥상통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쩌면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도 나누지 않은 물안개 같은 슬픔.


베를린에 와서 처음으로 울었던 날은 언어가 안 통해서 속상한 날도, 인종차별을 당한 날도, 화장실이 고장난 날도, 수업에 뒤처진 날도 아니었다. 눈을 뜨니 베갯잇이 흠뻑 젖어 있었다. 꿈속에 X-1이 나온 날이었다. 일어나서도 한참을 끄억끄억 소리내어 울었다.


X-1는 내가 독일로 떠나기 직전까지 만났던 전 남자친구다. 정확히는 독일에 온 초반까지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결국 그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머리와 마음에 칼을 품고 냉정하게 끊어냈지만 매 순간 X-1에 대한 생각에 고통스러웠다.


나보다 4살 어린 그와 일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우여곡절 많은 연애를 했다. 그럼에도 끝낼 수 없었고 붙잡으면 다시 돌아갔던 이유는 그만큼 사랑해서였다. 이십대도 아닌데 그렇게 사랑을 했다. 괴로운 만큼 행복하고 즐거웠다. 쪽팔리게도 독일까지 와서 그 아이를 생각한다.


오늘은 꿈에 X-2가 나왔다. 이십대에 오년 동안 만났던 전 남자친구다. 이젠 헤어진 기간이 함께한 시간 만큼 많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꿈속에 주기적으로 등장한다. 그래도 괜찮다. 씁쓸한 맛이 나는 꿈에서 깨어나면 또다른 꿈이 나를 맞이하니까.


X-2야, 우리가 만나던 어느날 나는 새로 생긴 꿈을 말했었지. 인생의 언젠가는 반드시 독일에 가서 살겠다고 말이야. 기억나? 지금 나는 그 꿈을 이루고 있어.


나와 헤어지고 평생 독신으로 살 거라던 그는, 현재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우리가 인연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X-3. 어쩌면 내가 독일로 오게 트리거 역할을 해준 사람이다. 그는 X-1과 잠깐 헤어진 사이에 4개월 남짓 만난 전 남자친구다. 나에게 맞는 그릇은 결코 아니었지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남자였다.


둘 다 어리지만은 않은 나이였기에 현실적인 얘기도 조금씩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정말 이 남자와 결혼을 하고 싶은지. 대답은 '아니'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나만 빼고 다들 좋은 짝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미래를 약속하고 함께하는 그 기적을 말이다. 그럼에도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오히려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


'그래. 지금이 독일로 떠나야 할 때다.' 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기로 했다. 마음을 먹자 그 뒤로 출국 준비는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부모님께 말씀드린 후 곧이어 오년 동안 다니던 회사에 알렸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지금 베를린에서 살고 있다.



17.07.2024 Berlin

오늘 아침 어학원 가는 길에 느닷없이 눈물이 흘렀다. 분명 양쪽 에어팟에서는 신나는 음악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리움도, 외로움도, 서글픔도 아닌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를 휘감았다.


떠올리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는 것... 뭉근한 어떤 것. 하지만 머물지 않기로 했다. 흘려보내기로 했다. 생리할 때가 돼서 호르몬 탓일 수도 있겠다.  


인생의 한 시절을 뜨겁게 사랑해준 나의 모든 전 남자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당신과 나의 인연은 거기까지. 나를 베를린으로 데려와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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