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는 늘 죽고 싶어 했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주어진 생을 살아내야만 하는 게 버거웠대."
"그렇게 인생이 억울하고 슬프면 그만 징징대고 다 끝내라고 해. 이 세상에 자기가 원해서 태어난 인간이 어딨어? 태어났으니까 이 악물고 사는 거지."
"...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살아버릴 것 같아서래. 그러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에 실패해서, 죽지도 못하고 되려 병신으로 평생 살아야 할까 봐."
유는 목폴라를 매만졌다. 석원은 유의 뒤통수에 턱을 살짝 괴고서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미안해. 방금 말 너무 함부로 했지. 요즘 잠을 통 못 잤더니 날카로워졌나봐. 어휴, 나야말로 살기 싫다! 근데 너 때문에 사는 거야. 널 두고 어딜 가겠어 내가. 그러니까 유, 너도."
애교 어린 사과를 건네는 데는 선수다. 유는 무거운 공기도 단숨에 가볍게 만드는 석원의 능력이 가끔은 부러웠다.
석원은 크고 기다란 손으로 유의 터틀넥을 만지작 거렸다. 캐시미어 뒤로 가려진 작은 목젖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서늘함을 직감할 때면 언제나처럼 그만의 방식으로 유를 안심시켰다.
유는 석원의 손길을 느꼈다. 지문 하나하나를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이 남자가 나를 어김없이 사랑할 것을 안다. 목폴라를 벗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피곤하면 구름 가서 한숨 잘래? 아니면 그 여자 얘기 이어서 들을래? 너는 눈 좀 붙이고 나 혼자 떠들어도 괜찮고."
"팔베개해주면 네가 먼저 잠들 거면서."
"김석원 넌 나를 너무 잘 알아. 그러니까 좀아까처럼 모진 말도 할 수 있던 거겠지. 어떻게 해야 내가 대미지를 입는지 아니까."
"상처 주려고 한 말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나는 그저 유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야. 아니, 행복은 너무 거창하고. 적어도 불행에 허우적거리진 않는 뭐 그런 거."
"충격요법 비슷한 건가."
"에이, 사실 타격 없잖아. 내가 널 모르냐. 일단 구름으로 가자. 네가 좋아하는 마라탕 시켜 먹자. 가는 길에 아예 포장해 갈까?"
"역시 넌 날 다룰 줄 알아."
"기분 좋아졌지?"
"심지어 조금 행복해져버렸어."
석원은 유의 밤색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흘러내리는 반곱슬에서 흑목련 향이 났다. 유가 항상 뿌리는 향수 냄새다. 언젠가 네가 사라진 대도 나의 모든 감각이 널 찾아낼 것만 같아.
둘은 구름으로 향했다. 서울 OO구 OO로 53길 4 '구름모텔'. 숙박 예약결제 앱에 등록되지 않은 모텔이다. 길찾기 어플에도 상호명 외에 객실 사진과 리뷰가 단 하나도 없는 곳. 이곳은 석원과 유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이다.
2년 전 즈음 석원이 사는 동네에 처음으로 놀러왔던 날, 빌라촌 담벼락을 꽉 채운 모텔 이름에 유는 웃음이 터졌다.
"구름모텔? 귀엽다. 근데 어린애들도 많이 지나가는 거리에 너무 떡하니 모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거 아냐?"
"내 말이. 나 완전 꼬맹이 때부터 쭉 이 동네 살았잖아. 초등학생 때 친구들이랑 약속 잡으면 맨날 '구름 아래서 만나' 이랬어. 그땐 저 계단 위가 뭔지도 모르고."
"한 번도 안 가봤어?"
"한 번도 안 가봤지."
"그럼 언제 한번 도전해 볼까?"
"와, 유랑 같이 구름을? 미쳤는데. 엄청나다. 좋아."
"딱 봐도 싸구려 여관인데 이름 때문인가? 내부를 전혀 알 수 없어서 그런가. 묘하게 가보고 싶어. 궁금해."
"만약에 방 상태가 너무 심각하면 바로 나오자. 나보다도 오래된 모텔이니까 아무래도..."
이후 어느 주말 오후, 웬만한 호텔은 전부 만실이었던 그날, 우린 구름 위를 걸어보기로 결심했지. 최악을 예상해서였을까. 촌스럽고 괴이한 인테리어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던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 누워있는 것 같아. 이래서 구름인가. 이대로 죽고 싶다. 영원히.
"무슨 생각해?"
"응? 아냐. 우리 여기 처음 왔던 날 떠올라서."
"유와 나의 아지트지. 먼저 씻을래? 배달음식 금방 도착하니까 내가 받고 있을게."
유는 샤워기에 길고 가녀린 목을 갖다 댔다. 이 물줄기가 칼이 되어 나의 목을 베어준다면... 목젖 주변에 흉진 얼룩덜룩한 점과 오돌토돌한 살갗을 찬찬히 더듬었다.
아름답지 않아. 새하얗고 부드러운 목을 가졌더라면 조금 덜 슬픈 인생이었을까. 눈물이 수돗물에 섞여 두 뺨을 타고 흘렀다.
다 씻겨내자. 흘려보내자. 유는 타들어갈 듯 뜨거운 물로 흉터 부위를 지졌다. 눈물의 온도보다 높아야 했다. 화장실 거울이 여느 때처럼 자욱해졌다. 비로소 유는 보이지 않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유, 마라탕 왔다! 냄새 장난 아니야. 샤워 다했으면 얼른 나와. 먹으면서 아까 그 여자 이야기 계속해줘."
오늘처럼 석원이 유의 목을 날것 그대로 본 것은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한 후였다. 단둘이 있을 때조차 늘 목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겨울에는 터틀넥과 머플러, 여름엔 스카프가 유의 분신이었다.
애써 모르는 척 해온 건 사실 석원 쪽이다. 그는 알았다. 마침내 유가 온전히 목을 내보였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샤워를 할 때마다 어떤 다짐을 하는지도. 그리고 죽고 싶을 때마다 구름에 온다는 김 서린 진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