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못 버는 디지털노마드보다 돈 버는 노동자로 살기로 했다.
코로나가 전국을 덮치기 전 모대학에 마을 지도가 강사과정을 신청했었다. 그러나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한 주 두 주 미뤄지더니 결국 강의는 시작하지 못하고 폐강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오픈 채팅방을 알게 되었다. 오픈 채팅방은 신세계였다. 매일 다양한 강의를 무료로 들었다. 주제도 다양했다. 심리. 자기 계발, 각종 어플 사용법 등 무궁무진했다. ‘이런 세상이 있었 다니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다.’ 고 생각했다. 늦은 시간 치킨집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잘 들리지 않는 소리에 집중하며 들었다. 그렇게 밤마다 강의를 들으며 독서모임도 가입해서 책도 읽고 그것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멤버십제도를 알게 되어 유료멤버가 되었다. 멤버만 되면 강의를 곧 하게 될 줄 알았다. 필요하다는 자격증을 몇 개 준비했다. 하나를 준비하면 또 다른 자격정이 필요했다. 처음엔 몇 만 원 자리 수강료도 겁이 났는데 강의를 들을수록 액수가 점점 늘어갔다. 돌이켜보면 귀신이 들린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 그렇게 지출은 자꾸 들었다. 비상금으로 모아두었던 돈도 바닥이 나고 나중에는 마지막 투자라고 하며 신랑한테 말하고 제법 큰돈을 주고 강의 신청도 했다. 그들의 말대로만 하면 금방 돈을 벌 것 같았다. 아이디도 월천댁이 흔했다. 처음 자기 계발 강의를 들을 때 한 달에 얼마를 벌고 싶다는 질문에 오백이라고 쓰니 것도 떨렸는데 어떤 사람들은 몇 천씩도 거침없이 써냈다. 하루에 몇 백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강사가 말한 대로 성공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가만히 보면 리더 혹은 멘토만 돈을 벌었다.
나도 블로그. 유튜브. 숏폼, 스마트폰 기능. 캔바, 씽크와이즈등 많은 공부를 했다. 온라인에서 강의를 하긴 했다. 하지만 그 수가 손에 꼽을 만했다. 번돈보다 쓴 돈이 훨씬 많았다. 내가 끈기 있게 한우물을 못 판 것도 이유이고 팔랑 귀로 이리저리 휩쓸린 탓도 있다.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며 잠도 자지 않고 기술을 익혔다. 가족과 대회시간이 줄어들었고 외출하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 시간에 책을 읽어야 했고 하나라도 더 배워야 했다. 40대 이후로 날밤을 새지 않았는데 하루이틀이 멀다 하고 날을 새었다. 오죽하면 남편이 당신 그러다 죽는다며 걱정을 하곤 했다
초보가 왕초보를 가르치면 된다고 일단 시작하라고 했다. 온라인 강의를 듣다 보면 정말 어떤 강의는 저 실력으로 강의를 한다고 라며 혀를 차게 하는 강의도 있었다. 나보다 못한 실력으로도 한 달에 몇 백씩 버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내가 완벽가지 않은데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보니 점점 오픈 채팅방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어느덧 4년이 지났다. 내가 원하는 디지털 노마드가 되지는 못했다. 다행히 그 비싼 수업료를 다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시간을 통해 나는 책을 가까이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 읽은 책이 지난 이십여 년간 읽은 책 보다 많았다. 책을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록하고 영상으로 남기는 법도 알게 되었다. 전자책도 혼자 만들어 등록을 할 수 있다. 캔바는 충분히 가르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PPT도 내가 원하는 대로 뚝딱 만들 수 있다. 브런치 작가도 되었고 독서모임을 운영하기도 했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강의를 들었다. 내가 갇혀 있던 세상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 공저책도 열권 넘게 썼다. 개인 전자책도 냈다. 전자책 강의를 꾸준히 하고 있다.
김미경 강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매일 그녀의 강의를 들었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날마다 적용하며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느 정도의 허영심이 깔려 있었다. 나는 노동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지식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점점 가난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있었다.
나는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다시 노동의 삶으로 가기로 했다. 지금 가정 형편은 더 이상 한가하게(?) 소비자로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남편은 말은 안 하지만 많이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월급쟁이가 되기로. 큰돈은 아니더라도 고정적으로 돈을 받는 일을 하기로 했다. 낮에는 요양보호사로 일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쓰고 책을 읽을 것이다. 몇 년 동안 나를 묵묵히 지켜봐 준 신랑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아내의 삶을 열심히 살아낼 것이다.
“여보, 그동안 고생했어요. 이젠 내가 도와 줄게요. 그동안 고마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