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바람 잘 날

없습니다, 없어요.

by 전화기

우리가 2019년 7월 홍콩에 왔을 때, 잠깐이라도 스친 홍콩어(Hong Konger, 그렇다, 홍콩 사람들은 스스로를 Hong Konger라고 부른다)들은 빠짐없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필 이런 시기에 홍콩에 와서 안 됐다. 원래 홍콩은 안전하고 좋아.” 그건 우리가 홍콩에 도착한 시기가 시위의 한창때와 겹쳤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홍콩의 시위는 이제 막 시작일 뿐이었다.



집을 계약하고 집에 필요한 잡동사니들을 사러 코즈웨이베이(현지인의 명동 같은 곳이라는 느낌이다) IKEA에 갔을 때, 언제나 시위의 집합 장소가 되는 그 곳의 차도를 가득 채운 시위대와 처음으로 조우했다. 그리고 그 후로 이어진 몇 달은 거의 영화 속에 사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 순간 가장 안전한 집에 있을 때에도 경찰차가 내는 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심하게 뛰는 상태가 되었다.


Sai Wan Ho 우리 집 1분 거리에서 홍콩 경찰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시민에게 총을 쏘았다. 홍콩에서의 우리는 까막눈에 막힌 귀로 소식이 늦은 탓에 신랑은 그런 줄도 모르고 수많은 외신 기자들을 뚫고 출근을 했다.

격해진 시위로 회사에서 조기퇴근을 한 날은 집 앞 모든 도로에 시위대가 교통방해 시위를 위해 인도의 보도블럭을 깨서 차도를 가득 매운 곳을 지나 걸어오기도 했다. 경찰의 총기발사 이후 우리 집앞 지하철 역은 한동안 시위의 구심점이 되어 지하철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시위 과정에서 다른 중국계 혹은 친중국계 상점을 훼손했고(우리 동네의 스타벅스 간판을 꽤 오랜시간 깨진 상태로 유지됐고, 중국계 빵집이 아주 질 나쁜 도둑을 맞은 듯이 모든 빵과 집기가 털려서 텅텅 빈 광경을 보았으며, miniso나 360 등 일부 중국계 가게는 이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한동안 간판을 목재로 가리고 지냈다), 반대로 정부는 시위대가 모이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꽤 많은 지하철에 지하철이 멈추지 않게 하고 지하철 운행 시간을 크게 줄였다.

나는 시위대가 지하철역의 cctv를 우산으로 깨는 것을 보기도 하고, 아파트의 경비 아저씨로부터 지금 앞 도로에서 티어가스(tear gas)를 쐈으니까 집 창문을 모두 닫으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집 앞 큰 도로 쪽은 시위대가 점령하고 있어서 집 뒤 쪽 아파트 단지로 산책을 나갔다가는 경찰과 시위대의 추격전을 피해 한 동안 다른 홍콩 사람들을 따라서 서서 기다린 적도 있다.

집 밖을 나가는 것이 어려워지고, 슈퍼가 일찍 닫고, 도시에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서렸지만 우리는 감정적으로 시위대의 편에 서 있었다. 하지만 꽤 긴 시간동안 시위대와 경찰이 경쟁하듯 서로 폭력적으로 변해가며 대치하는 상황에서 갈수록 두려움이 가중되고 조금씩 이 도시와 사람들에게 심리적 거리감이 생긴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언제부턴가 홍콩어들로부터 ‘하필 이런 시기에’라는 얘기를 듣지 못하게 된 것은 상황이 나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시위가 날이 갈 수록 더 심화되면서 홍콩 사람들도 이전의 평화로웠던 홍콩을 떠올리기를 멈췄기 때문이라고 느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2019년 말, 시위가 한창이던 때 홍콩 사람들과 홍콩이 굉장히, 매우, 아주 많이 우울했다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거나 거리를 걸으면 시민들의 우울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이 도시를 점령했다. 그건 Covid19가 반년 이상 지속되고 더이상 마음껏 식당 조차 갈 수 없는 2020년의 8월 지금과도 비교도 안 되는 깊은 우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례를 무릅쓰고, 이방인의 눈에 비친 홍콩은 시위가 Covid19 사태로 넘어가면서 도시가 조금씩 밝아진 느낌이다.



바이러스는 모든 것을 이겨서 시위 사태가 일단락 되기 이전에 다른 모든 도시와 같이 홍콩에서도 Covid19가 새로운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우리가 홍콩에 온 후로 바람잘 날은 하루도 없었다.


듣기로 SARS 당시에 홍콩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이 작고 밀도가 높은 도시에 균이 얼마나 빠르고 무섭게 퍼질지는 홍콩을 잘 알지 못하는 내 눈에도 선하게 보인다. 그래서인지 홍콩어들은 균이 퍼졌다는 얘기가 들리자마자, 그러니까 중국의 춘절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끼기 시작했다. 우리도 잘은 모르지만 회사에 홍콩어들이 마스크를 끼기 시작하기에 마스크를 사러 동네 약국에 갔다. 정확히는 신랑이 동네 약국에 가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마스크 5개 들이가 있고 50개 들이가 있는데 둘 중에 뭐로 살까?” 그러니까 마스크 5개로도 이 시기를 대충 지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기에 벌써 홍콩 사람들은 마스크를 끼기 시작했던거다. 그러나 나는 저 질문에 답을 할 필요가 없었다. 신랑이 나에게 전화를 한 30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에도 홍콩어들이 50개 들이 박스를 착, 착, 착, 착 사갔기 때문이다. 매진 문구가 뜬 홈쇼핑처럼 신랑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50개 들이 박스를 하나 들었다. 이 때 우리가 산 마스크는 일본산으로 개별 포장이 되어있고 이제와서 마스크를 반년 째 써 본 입장에서 평가해보았을 때 꽤 괜찮은 질의 상품이었다. 가격은 50개에 58달러, 그러니까 9,000원 쯤 했다.

그리고 그 다음주 출근한 신랑으로부터 엄청난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건 바로 신랑의 동료가 마스크 한 박스를 250달러를 주고 샀다는 것이다. 우리는 웃었다. 아니, 바가지 썼네. 우리가 지난 주에 살 때만 해도 58달러였던 것이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지금 갑자기 5배 가까이 뛰었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아니면 대단히 질이 좋은 마스크려나? 하필 그날 나는 아직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은 까닭에 출근 길에 마스크를 빼고 왔었다. 피곤한 김에 바깥에서 외식을 하고 싶은데 마스크를 끼고 오지 않았으니까 신랑이랑 근처 약국에 가서 마스크를 사서 낄 생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보게 된다, 5개 들이 마스크를 50달러에 파는 광경을. 이미 거리엔 마스크를 두겹으로 낀 사람들까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외식을 포기하고 입과 코를 휴지로 가린 채 서둘러 귀가했다.

야채도 우유도 닭고기도 모든 것이 수입인 홍콩은 마스크도 당연히 수입이다. 수입이기 때문에 공급은 더욱 불안정하다. 우리는 다행히 가격이 오르기 직전에 마스크를 사두기도 했고, 신랑 회사에서 매일 마스크를 한 개씩 받을 수도 있었고, 바이러스가 크게 퍼지기 직전에 한국에 다녀온 내가 사온 유한 킴벌리 덴탈 마스크(진짜 이게 최고다, 내가 써본 마스크 중에 퀄리티 최고!)도 있어서 6배 오른 가격의 마스크를 사지 않고 버틸 수 있었지만, 어쨌든 꽤 격동적인 마스크 가격의 추이를 살피는 것은 한동안 내게 꽤 중요한 일상이었다.

그렇게 비싼 가격임에도 지하철을 타거나 바깥에 나가보면 홍콩에 사는 99%의 사람들이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초반에는 서양인들 중 일부가 쓰지 않은 것을 보기도 했지만 유럽에서도 Covid19가 심해진 후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각자 마스크를 열심히 쓰는 덕분에 우리도 조금은 더 안심하고 생활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마스크와는 별개로 홍콩 정부에서는 모일 수 있는 인원수를 제재하고 식당의 수용 인원에도 제한을 두었다. 모일 수 있는 인원을 4명, 8명 등으로 제재하다가 지금은 갑자기 세자리수 확진자가 며칠째 이어지자 2명으로 제재한 상황이다. 식당에서도 이 인원 이상으로는 함께 식사를 할 수 없다. 홍콩에는 메이드 문화가 있어서 메이드들이 주말이면 도심의 공원 곳곳에 모여서 동향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고 주말을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무래도 좁은 홍콩에서 넓직한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으니 매우 밀집해서 모여있곤 한다. 너무 밀집해있다보니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조마조마해지곤 하는데 이런 조치로 조금은 서로가 조심할 수 있게 되어서 좋다(경찰들이 급여가 낮은 메이드에게 2~3,000달러 하는 벌금-거리두기를 위반한 것에 대한-을 주기를 어려워한다는 기사를 신랑이 봤다고 한다. 그래도 경각심을 위해서 조금씩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고…). 식당의 경우는 높은 자리세에 테이블 간격이라는 개념이 거의 부재하고 합석은 기본인 홍콩에서 테이블 간 1.5m 정도의 간격을 띄어야 하고 수용 인원도 50%로 제한하는 방향으로 Covid19의 꽤 초기부터 시행하고 있었다. 거기에 추가로 저녁에는 테이크아웃만 되고 식당에서 식사 금지. 확진자수 증가세에 깜짝 놀란 정부는 지난 달 갑자기 저녁 뿐만 아니라 아침, 점심에도 식당에서 식사 금지를 선언했는데, 집에 부엌이 많이 없고 당장 나가서 일하면서 끼니를 해결해야하는 홍콩인들의 반발이 엄청나게 많아서 하루인가 이틀만에 철회했다고 한다. 홍콩 식당의 좁은 자리가 불편했던 나는 가끔씩 외식을 할 때 자리가 쾌적해진 것에 감탄하다가도 입에 맞는 가게들이 이러다가 다 문을 닫는건 아닌가 걱정도 했다가,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몸은 좀 불편하더라도 가게들이 장사가 잘 돼서 마음 편하게 먹는게 좋지 않나 생각하곤 한다.



나는 어렸을 때는 아빠의 선택으로 짧은 시간 캐나다에 살았었고, 이번에는 신랑의 선택으로 홍콩에 살고 있다. 애국심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부족한 편이지만, 캐나다 살이 이후로 어쨌든 우리말 쓰는 우리 나라가 내가 살기에 가장 편하고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홍콩은 더욱이 집도 인도도 가게도 좁은 나라라 이런 저런 고민과 어려움으로 가득찬 마음을 내려놓을 공간마저 부족하다보니 정을 주기가 영 쉽지 않다. (물론, 캐나다는 캐나다대로 지겹게 눈이 내리고 부모님의 돈 벌기가 너무 고되었던 탓에 정을 못 준것은 매한가지다.) 그런 와중에 시위와 바이러스까지 겹쳐서 사실 나는 홍콩살이가 너무 너무 힘들었다. 혼자 있을 때에도, 신랑을 앞에 두고도 운 날이 많다. 그래도 이렇게 긴 글을 쓰면서 생각했다(이번에도 다 쓰고 보니 길어서 깜짝 놀랐다). 홍콩에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내가 정말 많은걸 목격했고 그러면서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성장통이었다. 성장은 대개의 경우 계단식이라고 했으니까 이번 계단은 무사히 넘어온 걸로, 그리고 다음 계단은 조금 멀리 있는 걸로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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