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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03. 2020

루미, 너의 이름, 나의 이름

<루미의 여인숙> 제1화

내 이름은 루미다. 이렇게 명명키로 했다. 어제까지는 아무 아무개였지만 오늘부턴 루미란 이름으로 살아 보고 싶어서다. 이런다고 딱히 달라질 건 없다. 이름은 이름일 뿐, 언제라도 뗄 수 있는 명찰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루미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에 하고 많은 게 닉네임이고 아이디고 별명인데 내가 당분간 루미란 이름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뭐가 문제겠는가.   

 

내가 루미란 이름을 처음 만난 건 수년 전 한 지인이 보내온 일련의 시편들을 통해서였다. 그중 하나는 이러했다. 


‘우리네 몸은 여인숙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다


그를 어깨에 얹힌 짐이라 여기지 말라 

금방 무의 존재가 되어 날아가 버릴 테니 


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그대의 가슴으로 오는 것은 언제나 손님

기쁜 마음으로 환대하라’ 


이 시인의 이름이 바로 마울라나 젤랄렛딘 루미. 잘랄 아드딘 무하마드 루미라고도 한다지만 그냥 루미로 통하는, 13세기를 살았던, 이슬람 최고의 신비주의 시인. 그의 ‘여인숙’ 시는 내게 잔잔하고도 깊은 위안을 주었었다. 당시 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뭇사람들뿐 아니라 가까운 지인들까지도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에서 몰아냄으로써 적잖게 힘겨워하던 중이었으니까. 배척과 경계 지움에는 따라오기 마련인 하늘의 벌이었다.  

 

자기를 찾아온 어떤 것도 귀한 손님으로 맞아 정성껏 보살피고 대접해 보내라는, 성스럽다 할 저 아름다운 메시지는 물론 루미만의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전주의 한 시인 안준철도 <손님>이라는 시에서 노래한 적이 있다. 

 

‘슬픔이 다녀간 곳에는 

빛이 스러져간 별자리처럼

맑고 투명한 얼룩이 남아 있다


오늘도 손님처럼 찾아온 슬픔을

아침이 올 때까지

잘 대접하여 보내주었다’ 


손님으로서의 슬픔은 이미 슬픔 너머의 것. 13세기 페르시아의 루미와 21세기 한국의 안준철은 이렇게도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루미의 ‘여인숙’ 시 두어 군데에 밑줄을 그었었다. 어쩐지 그것들은 ‘루미만의 것’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를 어깨에 얹힌 짐이라 여기지 말라

 금방 무의 존재가 되어 날아가 버릴 테니’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자긍심과 수치심, 밝은 생각과 어두운 생각, 천사와 악마 등 그 어떤 손님도 ‘금방 무의 존재가 되어 날아가 버릴’ 것들이라는 무섭고도 찬란한 진실. 그리고, 


 ‘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그렇다. 모든 손님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 미지의 세계, 예측 불가의 세계에서 온다는 것. 이 또한 무섭고도 찬란한, 가슴 뛰는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오래전 그날 그 시각에 루미라는 낯선 손님이 나를 찾아올 줄을 누가 무슨 수로 알 수 있었겠는가. 


800년 전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한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예순 중반의 나이에 땅 속으로 바람 속으로 사라졌었다. 시인은 필경 밤하늘 별이 되었고 한 송이 들꽃으로도 피어나곤 했을 것인데 어느 날 문득 내 캄캄한 머리 위 빛나는 별로, 내 흔들리는 가슴 들판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800년이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름의 시간은 그저 이름일 뿐, 도무지 알 수 없는 지금만이 천공의 무한한 별들처럼 지상의 무한한 꽃들처럼 순간순간 반짝이며 솟아나고 있다는 참 어리둥절한 진실 앞에서 나는 더없는 평온을 느낀다. 고향의 품에 안긴 듯 비로소 안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고향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는 고향을 떠난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한 이는 누구였던가? 나였나, 그였나? 아무튼 나는 오늘 그 어떤 존재에게 합장한다. 


나의 손님, 고귀한 루미여. 

그대가 내 오래된 집의 굳게 잠근 문을 두드렸을 때, 그리하여 꿈에서 깨어나듯 문을 활짝 열어젖힌 나는 한눈에 그대를 알아보았었다. 그대는 이미 나의 고향인 것이었고 나는 문득 나를 버리고 루미, 루미가 되고 말았다. 그나 나나 '금방 무의 존재가 되어 사라질/사라진 존재'로서 어쩔거나, 그냥 하나가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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