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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08. 2020

너의 천국, 나의 여인숙

<루미의 여인숙>제2 화

여인숙. 그러니까 旅人宿. 여인(旅人)은 국어사전의 사뭇 긴 풀이에 따르면 ‘집을 떠나 여행 중이거나 일정한 거처가 없이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객지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니 잘 숙(宿) 자를 붙인 여인숙은 그냥 그런 사람이 자는 곳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인숙, 하면 절로 여인(女人)을 떠올리게 된다. 왜 그럴까? 내가 여자였다면 다른 상상을 했을 수도 있으리라. 물론 여인(旅人)을 여인(女人)으로 오독한다고 해서 여인숙을 여인들이 숙박하는 곳으로 생각했다는 건 아니다. 그저 내 마음 사전 속 여인숙은 미지의 어떤 여인이 정처 없이 떠도는 사내를 아무런 조건 없이 하룻밤 품어주는, 그렇게 이미지화 된 곳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미지는 언어고 생각이고 허상이고 압핀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오래 전 내가 묵었던 여인숙들을 떠올려본다. 객지, 쓸쓸함, 가난, 슬픔, 추위, 연탄아궁이, 헐한 ‘카시미롱’ 이불 밑 뜨거운 장판, 물주전자와 스텐 컵이 놓여진 쟁반, 낡은 선풍기, 그리고 책보만한 작은 창문이 나 있는 벽 위쪽엔 고혹적인 입술로 소주를 권하는 비키니 차림의 여인이 이쪽을 건네다 보는 달력과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희야 사랑한다’와 같은, 왠지 비장하게 다가오는 정겨운 낙서들…… 


높디높은 고급 (즉 매우 비싼) 아파트에 사는 지인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도무지 집이 아니었다. 번쩍번쩍 화려한 호텔이었다. 어릴 적 즐겨 불렀던 노래,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집 내 집뿐이리’의 집이 아닌 그 현대판 성채는 나를 품어주기는커녕, 압도했고 불편케 했었다. 


나도 부호나 왕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호텔이든 성채든 다 ‘즐거운 나의 집’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그런 운명이 아니었으니 다행이라면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부자가 천국에 드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예수의 말은 비유가 아니라 리얼한 직설이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가난의 진실, 초가삼간의 진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또한 태어난 곳이 호롱불을 밝힌 마구간이었고 목수의 아들로 수공업적 노동을 하며 살았다. 그에게 천국은 그런 곳이었다. 갈릴리 호수의 바람, 광야의 햇살, 한 조각 부드러운 빵과 한 잔의 포도주, 춤추는 나무와 우짓는 새,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갓 피어난 처녀들의 웃음소리와 꿈같은 혼례식, 성스런 장송곡, 달빛과 적막과…….


‘우리네 몸은 여인숙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다’


루미는 이렇게 노래했다. 호텔이나 고급 아파트는 없는 그 시절이라 해서 어찌 넓고 높고 화려한 왕궁까지 없었을까. 그러나 루미는 여인숙, 가난한 여인숙을 노래했다. 가난하기에 비로소 여인숙이고 여인숙이기에 날이 날마다 ‘새로운 손님’을 맞이할 수 있다. 여인숙은 가난할 뿐 비좁은 곳이 아니다. 루미의 영혼은 고급 호텔이나 왕궁에서 오히려 숨이 막힌다. 가난하다는 것. 비어 있다는 것. 꼭 쥐고 있을 것이 없다는 것. 우리 존재의 본성이 그렇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의 적이다.

공작새의 화려한 날개가 공작새의 적이다.

아! 왕을 죽인 것은 왕의 넘치는 위엄이었다.’

                                      -<루미 시집>, 정제희 옮김, 시공사, 2020, 27쪽


13세기의 루미는 21세기의 루미에게 묻는다. 그대는 무엇을 그리도 꼭 쥐고 있는가?그 쥐고 있는 것이 그대의 적이고 필경엔 그대를 죽일 것일 터인데? 여인숙은 움켜 잡고  있는 게 없다. 가난하고, 텅 비어 있다. 구멍이 나고 비어 있기에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퉁소와도 같다. 그 여인숙의 물주전자는 진정 목마른 자의 목을 축여 줄 것이고 그 여인숙의 카시미롱 이불은 진정 추위에 떠는 자의 몸을 데워줄 것이다. 목마르지 않는 자, 추위에 떨고 있지 않는 자, 여인숙의 천국에는 영영 닿지 못하리라.  


그런데 루미여, 우리는 왜 꼭 목이 말라야하며 왜 꼭 추위에 떨어야하는가? 


아, 그렇지. 그대는 ‘신비스러운 가난’에 대해, ‘영혼의 가난’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하늘로 이어진 사닥다리’에 대해서도. 창공으로의 비상을 위해서는 가난한 영혼이, 목  마르고 추위에 떠는 영혼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지.


‘어제 나는 꿈결에 가난을 보았네.

어찌나 아름답던지 나의 넋을 앗아가 버렸네.

나 그 우아함과 완벽함에 취해

날 샐 때까지 활활 타올랐네.

그 모습 루비 광산 같았네.

붉은 비단옷으로 나를 덮었네’

-<루미 평전: 나는 바람, 그대는 불>, 안네마리 쉼멜, 김순현 옮김, 

늘봄, 2019, 196쪽 

                           

우리 시대는 저 ‘루비 광산’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 버린 것만 같다. 가난은 도처에 있는데, 우아하고 완벽한 루비의 영혼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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