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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17. 2020

너는 사랑, 나는 종복(從僕)

--<루미의 여인숙> 제3화

어느 날 문득 천국의 문은 열렸고 안으로 펼쳐진 연초록의 들판으로 봄바람은 불어왔으니 그 훈풍에 실려 나는 노랑나비 흰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세상은 매화, 배꽃, 복사꽃, 꽃, 꽃, 꽃 천지였다.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었다. 투명해진 내 몸은 향기로운 과즙으로 가득 차 출렁이는 것만 같았고 영혼은 새가 되어 푸른 바다 위를 낮게 높게 유유히 날았다. 자연이든 인공이든 만물 하나하나가 다 백배 천배는 더 또렷또렷해졌다. 햇살이 비치니 환히 드러나지 않는 게 없었다. 자유란 그런 거였다. 어떤 속박에서 풀려나는 게 아니라 이미 내가 햇살에 드러난 가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찻잔을 보면 그건 정말 찻잔이었고, 우산을 펴면 고맙고 고마운 비는 눈물처럼 내리는 것이었다. 아, 그리고 밤은 또 얼마나 까맣게, 찬란하게 빛났던가. 그러니까, 사랑이, 여자의 형상을 하고서 내게로 왔던 그 어느 날들이 그러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그 날들을 떠올릴 때면 나는 만해 한용운의 시 <복종>을 생각하곤 한다. 단 한 번이라도, 저 알 수 없는, ‘산 너머 남촌’으로부터 찾아온 사랑을 한 가슴으로 맞이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리라. 우리가 구가해야 한다고 굳게 믿어온 ‘자유’란 게 한용운의 ‘복종’에 비한다면 얼마나 헐벗은 것일 수 있는가를. ‘복종’에 순종한 만해 선사의 ‘나’는 바로 사랑의 종복. 루미도 노래한 적이 있다.   


‘당신은 사자와 같고

나는 노루처럼 사로잡혔습니다.

이처럼 자유를 두려워하는

동물을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겁니다.’


--<루미 평전: 나는 바람, 그대는 불>, 

안네마리 쉼멜, 김순현 옮김, 늘봄, 2019, 277쪽 


루미의 ‘당신’은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랑이다. 참된 기독인이라면 하나님, 붓다의 벗이라면 법(法)일 터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너도 나도 소나기 쏟아지는 여름 들판에 알몸으로 서 있게 되었을 뿐, 소나기와 하나가 되어 흠뻑 젖을 일만 남았을 따름이니까. 사랑의 소나기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 온 우주가 엄마의 품속이라  자유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니까.       

허나 루미여, 그대도 한결같이 말했다는 걸 나는 안다. 천국의 문이란 게 있다면 그 반대  편엔 지옥의 문도 우뚝 서 있다는 것. 열린 문은 닫힐 운명이기도 하다는 것. 봄바람이 불면 북풍한설도 저만치서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것. 노루는 사자를 의심하고, 자유를 갈망하고, 공포에 사로잡히는 날은 오고야 만다는 것. 불어오는 봄바람은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것. 


정녕 그랬다. 사자를, 봄바람을, 자기만의 우리에 가둬 영원히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괴물처럼 뭉게뭉게 커져갈 때 어디선가 지옥의 문이 텅하고 열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그럼에도 눈 뜬 장님인 노루는 무한 에너지로 훨훨 타는 지옥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었다…….  

    

루미여, 이것이 내 젊은 날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한 편의 드라마다. 천국의 문은 지옥의 문과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지옥의 고통을 통해 알려준 사랑의 드라마. 고백건대 나는 지옥의 잿더미 속에서 꺼져버린 희망의 불씨를 살려보려고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었다.


그러나 


‘여기로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대와 같은 13세기를 살았던 이태리의 시인 단테. 그가 이끈 지옥의 문설주 위에 걸려 있다는 글귀. 이 말은 지금도 나를 경책한다. 희망을 버려야 할 때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자의 절망적 고뇌. 악마의 연정으로 캄캄하게 전락한 내 사랑의 드라마는 진작 막을 내렸음에도 악착같이 나를 옭아매었던, 희망이 만들어낸 지옥의 길고 긴 그림자, 그 불의 낙인. 마음의 지옥을 끝장 낼 유일한 희망의 방책은 희망을 버리는 것, 움켜쥔 손을 활짝 펴 버리는 것임에도. 


'사랑 도살장에서, 그들은

약하거나 불구인 놈은 말고

가장 잘 생긴 놈만 죽인다

이 죽음에서 달아나지 말아라

사랑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은 자, 죄다

죽은 살코기다' 

                                 --<루미 詩抄>, 이현주 옮김, 늘봄, 2018, 41쪽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사랑에 복종할 수 없다는 것. 사랑 앞에 오체투지 함으로써 비로소 끈질긴 나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   


'사랑으로 인해 죽은 자가 생명을 얻고

사랑으로 인해 임금이 종이 되고....' (<루미평전>, 249쪽)


그러기에 루미여, 

또한 사랑으로 인해  종은 임금이 되고, 임금과 종이, 종과 임금이 하나가 되면 그대의 사랑 도살장에는 약하든 불구든, 못 생긴 놈이든 잘 생긴 놈이든 왕이든 종이든 이미 사랑의 축복으로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것 아닌가? 


그러기에 루미여, 말해다오.


저 얼굴 없는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정녕 사랑의 봄바람은 '산너머 남촌'에서 오는가? 

산너머 남촌은 어디에 있는가?

안인가, 밖인가?


동화 속 두 아이가 찾아 헤맨 파랑새는 먼먼 산속이 아니라 아이들이 놀던 집 안에서 노래하고 있었던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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