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지형 Feb 15. 2021

기억과 현상

<나의 기억 현상소> 제1화 

바다 안개가 걷히면서 점차 배는 모습을 드러낸다. 암실의 필름에서 흑백의 형상이 슬며시 나타나듯이. 기억도 그렇다. 


기억은 어디에 숨었다가 돌연 내 앞에 현상하는 걸까? 어둔 골방에 쌓였다가 먼지로 흩어질 운명인 그것. 기억은 항상(恒常)할 수 없다. 


그러나 빙하의 보이지 않는 영역도 늘 얼음 결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말없는 빙하처럼 짱짱하게 강력한 기억. 그 놈은 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문득 차갑게 빛을 내며 지금 이곳의 세계에 출현한다. 몸을 받고 다시 태어난다. 요컨대 현상(現象)한다. 그럴 때 그것은 더 이상 기억이 아니다. 온전한 세계고 온전한 당신이다. 우리는 잊곤 한다. 내가 나라 여기는 나도 기억의 한 현상이라는 것을.

 

죽은 자가 저 피안으로 가기 전에 꼭 거쳐야 하는 학교를 상상해본 일본 영화가 있었다.〈원더풀 라이프〉. 육체의 무게와 따스함을 갓 잃고서 아지랑이처럼 영혼만 가냘프게 걸치고 나타난 망자에게 그곳 교사는 말한다. 


당신의 생애에서 가장 ‘원더풀’ 했던 순간 하나만 기억해 내 봐요. 우리가 그 기억을 현상해서(비디오로 재현해서) 그것만 가슴에 품고 저승으로 가게 해 주겠어요. 단 기한은 3일입니다. 


처음 망자들은 그것을 그리 어렵지 않은,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숙제라 여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 몇몇은 혼란에 빠진다. 그것은 단 하나라는 전제도 전제지만 교사들이 요구한 순간이 행복했던(happy)도 즐거웠던(joyful)도 아닌 원더풀(wonderful)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원더풀. 

사전은 ‘놀라운, 불가사의한, 경이로운, 멋진, 훌륭한’이라 풀이한다. 이 중에서도 영화와 관련시켜 가장 적확한 말은 ‘불가사의’와 ‘경이’가 아닐까? 한 순간을 택하라고 영화 속 교사는 종용을 하는 것이지만 우리네 인생 자체가 불가사의고 경이의 연속이니까. 그래서 ‘원더풀 라이프’인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만남도 이별도, 오해도 공감도, 미움도 사랑도 목전의 죽음 앞에서는 …….! 무(無)의 필름에서 가만히 현상되는 삶의 기억만큼 애틋하고 실답고 아름다운 것이 달리 있을까.   

  

한 가지 오래된 오해가 있다. 지식과 경험을 쌓을수록, 혹은 1차원에서 2차원으로, 또 3, 4차원으로 갈수록 생은 깊어지고 어쩌면 그 비밀도 밝혀질 거라는 것. 나도 그랬다.  


‘생각노니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어린애의 영혼으로 돌아간 한 술꾼 시인은 이렇게도 노래했다. 하지만 깊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생의 의미는 과거로 갈수록 깊어지고 현재로 올수록 얕아지는가? 맑은 거울에 비친 지금 여기의 생은 깊은가 얕은가. 필름도 거울처럼 평면이이지만 그 평면은 아무래도 그저 평면인 것은 아니다. 깊은 평면. 현상의 깊이. 그 불가사의와 경이로움. 


나는 모른다. 내 기억의 어떤 편린들이 지금 이곳 내 앞에서 불현듯 현상하게 될 지, 그 앞에서 나는 무엇일지가 자못 궁금할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너는 사랑, 나는 종복(從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