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깊은 자아성찰의 힘
바로 이전의 글을 통해 자아실현이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만의 '한 문장'을 정립하여, 이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과정이다.
이 한 문장이 계획, 선택 그리고 노력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이 한 문장으로 내 계획, 선택 그리고 노력이 해석된다.
매일매일 내가 무엇을 해야할 지 알려주는 나침반 같은 한 문장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
'깊은' 자아성찰을 하자.
깊은 자아성찰이 있다면 얕은 자아성찰도 있을까?
아래의 내 이야기를 통해 이에 대해 살펴보자.
일단 깊은 자아성찰이 목적이지만, 접근은 가볍게 하는 것이 좋다.
자아성찰을 하기 위해서는 크게 2가지 방법이 있다.
바로 ‘지난 일에 대한 회상’과 ‘새로운 경험’이다.
나는 20살이 되자마자 인생의 한 문장을 정립하기 위해서 자아성찰을 하기로 마음을 먹게된다.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기 전에 내 기준을 갖기 위함이었다.
1)
나는 학생때 친구들을 웃기는 게 즐거웠다.
만약 이 자아성찰에만 비추어 봤을 때는 내 진로를 '개그맨'이라고 정해버렸을 지도 모른다.
이게 바로 얕은 자아성찰이다.
깊은 자아성찰을 하면 나의 다른 부분까지 해석이 된다.
친구들을 웃기는 것에 대해서 고민해보니,
어떨 때는 별로 안기쁘고 어떨 때는 많이 기뻤다.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그 차이는 '내 머릿속에서 나왔느냐'였다.
개그프로그램을 그대로 따라하거나 얼굴을 망가뜨려서 웃길 때는 크게 기쁘지 않았다.
반면에 각 상황에 맞는 나만의 재치로 웃기는 건 너무 즐거웠다.
왜 그런지 고민해봤더니,
나는 나만의 생각 또는 새로운 생각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게 큰 기쁨 중에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신기한 것은, 이걸 깨달으니 다른 경험들이 해석이 되더라는 것이다.
가끔 친구들이 내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신박하다."라고 했을 때 나는 아주 기뻤는데,
그때는 그냥 인정받아서 좋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다르게, 새롭게 생각해내는 게 좋았다.
이렇 듯 1차적인 자아성찰에서 조금만 더 깊이 성찰해보면 다른 경험들 까지 해석이 되는 경우가 있다.
2)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그 때 나는 아무 생각없이 글씨 쓰는 걸 연습하고 있었다.
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글씨 쓰는 거 좋아하는구나?”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그러네? 몰랐네’ 이러면서 또 고민에 빠졌다.
이번에도 얕은 자아성찰만 했다면 '캘리그래피'가 내 꿈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왜?'라는 질문을 하게된다.
그때의 나는 '필기할때의 촉감, 필기할 때 나는 소리, 글씨가 얼마나 잘써지는지'를 염두에 두며 글씨 쓰는 것을 연습했었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한다기 보다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이를 통해 내가 '왜 밥을 천천히 먹는지, 왜 걷는 것을 좋아하는지, 왜 카페에 가만히 앉아 아이들이 노는 걸 구경하는 게 즐거웠는지' 해석이 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 나는 감각적 아름다움의 극대화를 위해 마음챙김을 연습하기도 한다.
3)
나는 내성적인 편이다. 중,고등학생때는 훨씬 심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발표'를 많이했다.
그리고 댄스동아리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내 원래 성향과는 다른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자아성찰의 힌트를 얻게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특정소수와의 양방향 소통'을 할때는 엄청 조용하고 말도 적다.
(ex. 10명의 친구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것)
하지만 '불특정다수에게의 단방향 소통'은 내게 긴장과 두려움도 주지만 큰 기쁨도 준다.
(ex. 100명에게 발표하기 또는 춤추기)
그래서 대학생때도 발표관련 수업이 있으면 꼭 나가서 발표를 했다.
좋아하니까 학점도 자연스럽게 높게 나왔다.
예를 들자면 나는 10명(여기에서의 10명에는 가족,애인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에게 100의 사랑을 받는 것 보다 1000명에게 1의 사랑을 받는 것이 나는 좋다.
그래서 강연가를 한 때 꿈꾸기도 했었지만, 현재는 강연가가 목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목표가 아니라, 내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성찰하는 것이다.
나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사랑'이라는 가치가 내게 큰 기쁨을 주는 것 중에 하나이다.
예를 들자면 헤어 디자이너가 되어 한명한명에게 아름다움과 자신감을 주는 것보다,
향수연구원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자신감을 주는 게 나는 더 좋다.
향수연구원이 더 고귀하다는 게 아니다.
헤어디자이너는 소수에게 100이라는 자신감을 준다면,
향수연구원은 다수에게 10이라는 자신감을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엇이 더 가치있는지 가릴 수 없다.
하지만 둘 다 가치있는 일이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4)
내가 가진 용기의 범위 내에서의 새로운 경험들도 했다.
집 앞의 카페도 가보고, 성곽도 거닐어보고,
미술에 관심 없었는데도 미술관도 가보고 하는 등의 경험들을 했다.
영화, 드라마를 통해 간접경험도 하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떠한 감정을 가지는 지 관찰했다.
이런 일들을 전부 모아서 위와같이 깊은 성찰을 위해 질문을 던졌다.
위의 사례들을 봤을 때, 내가 이야기하는 '깊은 자아성찰'이 무엇인지 감이 올 것이다.
얕은 자아성찰로는 내 인생의 기준을 정하는 게 어렵다. 너무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ex.글씨 쓰는 걸 좋아하니 캘리그래피를 해볼까?)
인생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가치를 찾고 싶다면 한번 깊게 내려가보자.
(ex.나는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기쁘구나.)
훨씬 추상적으로 바뀌었지만,
'감각적인 아름다움'은 '글씨 예쁘게 쓰기' 말고도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실현할 수 있다.
이렇듯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유연성을 가진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깊게 성찰하면 내 감정의 많은 부분이 해석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소에 왜 미니멀리즘에 관심을 가졌는지,
마음챙김을 왜 즐거워 하는지 등의 행동들을 '감각적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통해 해석이 된다.
나는 바로 이전 글에서 내 인생의 한 문장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그 한 문장을 통해서 내 모든 계획이 파생된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한 문장을 통해서 내 모든 능동적인 노력들이 해석된다고 했었다.
깊은 자아성찰을 이어나가면, 내 인생이 해석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다시 20대 초반의 자아성찰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나는 이러한 여러가지 성찰의 과정을 거치고,
마침내 20대 초중반에 이러한 인생의 한문장을 정립하게 된다.
‘공학적 창조를 통해서 세상에 감각적 아름다움을 주고, 그로인해 받는 사랑으로 살겠다.’
문장을 정립하고 나서 정말 기뻤다.
'이제 이 문장대로만 살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공과는 다르지만 전자회로를 개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가 되었고,
운이 좋게도 전자회로 연구원으로 취업을 해서 내 가치를 위한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근데 현재 내 인생의 한 문장과 저 때 정립한 한 문장이 다르다.
한번 정립한 게 완벽할수는 없다.
아니 완벽한 성찰이란 없을수도 있다.
그리고 사람은 계속 변한다.
어느 나라의 속담처럼 "당신은 그 모습 그대로 완벽하지만, 개선의 여지는 있다."
인생의 한 문장을 정립하면 장점이 하나 있다.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다 안 맞는 부분이 생기면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그 부분을 다듬게 된다.
이러한 성찰이 이어져 오면서 현재의 한 문장으로 오게 되었다.
사랑과 충만함의 향기를 잘 가꿔서 퍼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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