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대학 강좌에서 윤동주(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조정래(태백산맥)를 중심으로 시 낭송과 작품 배경 등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휴가 기간이었지만 코로나 19로 멀리 가지 못한 대신에 <나 홀로 문학기행>을 시도했다. 집에서 차로 30여분 거리 인지라 가볍게 모자 하나만 걸치고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이용하였더니 남해고속도로 진월 IC에서 5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접근성은 좋았다. 마침 문화해설사가 오랜만에 출근했다면서 10여 분간 <윤동주 시비공원>에 대한 설명을 해주어서 매우 유익했다. 다음은 강의시간에 들은 내용과 현장 설명 등을 토대로 정리해본 글이다. 윤동주 시비들이 세워진 광양시 망덕포구는 위치가 남해고속도로 섬진강 휴게소의 남쪽이고, 임진왜란 당시 배를 제작하던 선소가 있던 자리이다. 일설에 의하면 네 척의 배가 여기에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윤동주 유고 원고가 보관되어 있던 정병옥 가옥으로부터 오백여 미터쯤 될까? 걸어서 사오분 거리에 있다. 이곳은 정병욱과 윤동주가 믿음과 우정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정병욱과 윤동주가 만나게 된 계기가 있다. 정병욱은 윤동주보다 나이는 5년 아래이고 연희전문대 2년 후배이다. 정병욱이 연희전문대 1학년 재학 때 『뻐꾸기의 전설』이라는 글을 썼는데 그것은 전쟁에 관한 글이었다. 이 글을 읽고 같은 학교 3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윤동주가 정병욱의 교실을 찾아간다. 이때부터 그들은 기숙사 방을 함께 쓰며 1년 7개월간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교류하였다. 그러다가 1941년도 윤동주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도일 전에 윤동주는 자신의 육필 원고(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세 부를 준비하여 한 부는 연희전문대의 이양하 지도교수, 한 부는 본인, 나머지 한 부는 믿을 만한 후배인 정병욱에게 맡기고 떠난다. 그 후 1944년도에 정병욱마저 학도병으로 일본에 끌려간다. 1945년 8월에 조선이 해방되었는데 정병욱이 도일하던 때는 일제가 패망을 1년 앞두고 마지막 발악을 하던 무렵이었다. 1944년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전쟁물자가 부족해지자 당시 식민지 상황이었던 조선에서 전쟁 자원이 될 만한 것들을 모두 쓸어갔다. 심지어 문고리, 대야, 숟가락까지 공출해가는 바람에 제사에 쓸 숟가락을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어두는 것이 풍속이 될 지경이었다. 이때 우리의 슬픈 역사에 드러난 것처럼 소녀들은 정신대로 청년들은 총알받이로 전쟁터로 끌려간다. 학도병으로 끌려간다는 것은 십중팔구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던 상황으로 살아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정병욱은 자신의 귀중품을 어머니에게 맡기는데 그중의 하나가 윤동주의 육필 원고였다. 그러면서 “이 원고는 동주 형이 쓴 원고인데, 저나 동주형이 돌아오지 못하거든 이 원고를 연희전문대에 전해주세요. 그러면 교수님들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하고 어머니에게 부탁한다. 정병욱의 아버지는 교사 출신이었고 어머니도 배우신 분이었다. 어머니는 슬기롭게 귀중품들을 항아리에 넣고 마룻바닥을 뜯어 그 아래에 보관했다. 윤동주는 해방 6개월 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순국하고 정병욱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온다. 정병욱은 오사카 포병부대에서 포탄이 날아가는 각도를 조절하는 임무를 맡았고 그러다 보니 전사할 확률이 낮았던 것 같다. 그가 살아 돌아와서 윤동주가 순국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윤동주의 원고를 세상에 알리기로 다짐한다. 귀국한 정병욱은 서울대학에 진학하였고 나중에 서울대학 교수가 된다. 그리고 우리 국문학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리는 데 상당한 공헌 하며,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것도 정병욱 교수의 역할이었다. 또한 윤동주를 세상 밖으로 내보는 작업도 그의 역할 중의 하나이다. 교과서에 『서시』,『자화상』이 실리면서 세상 사람들이 윤동주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 우리들의 가슴에 윤동주가 가슴속에 살아남아 있는 것은 그의 생각과 올곧은 정신과 행동이 일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윤동주는 시집을 세상에 낸 적도 없고 어디에 등단한 적도 없는 무명 시인으로 그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한반도의 북쪽 북간도에서 태어난 그가 한반도 남해안의 중앙에 위치한 바닷가 광양에서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 윤동주의 시는 이제 한반도를 넘어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사랑을 받고 있다. 조선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서도 오백 년씩이나 왕조를 지탱한 것은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이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결국 민초들이나 불사이군과 같은 선비적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라가 어려울 때 독립운동을 하거나 적지 않은 고뇌와 그에 따른 행동이 일치되어 나타난 결과들이 현재의 우리가 있게 된 원동력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1917년에 태어나 일본 식민지 국민으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라면 윤동주처럼 살아가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미 나라는 일본에 빼앗겨버렸고 독립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오히려 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 태어났음에도 지식인으로서 고뇌와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가 그의 글 속에 담겨 있기에 우리는 그를 존경하고 그의 시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현재 윤동주 시비가 세워진 공원은 예전에 바다가 있던 자리를 매립하여 육지가 되었는데 옛날에 미적(米績:이순신 장군이 쌀을 쌓아 놓았다는 유래) 섬 또는 무접(舞蝶:나비가 춤을 추는) 섬이라고 불렀다. 지나간 역사와 현재가 살아 숨 쉬는 이곳이 어쩌면 필연적인 만남의 장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보관했다가 세상에 내놓은 정병옥 서울대 교수는 61세에 서거하였다. 그런데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 중의 하나인 『서시』는 지인의 부탁으로 책머리에 서문을 대신하여지었던 글이라고 한다. 현재 윤동주 육필 원고-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보관했던 고 정병옥 가옥이 현재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망덕포구는 섬진강 휴게소에서 순천 방향으로 첫 번째 IC이고, 예전부터 횟집들이 여러 곳 영업 중이다. 이곳에서 매년 8월 말에서 9월 초 사이에 이틀간 광양 전어축제가 열렸으나 올해는 코로나로 인하여 축제가 취소되는 것 같다. 그래도 전어철이 되면 외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이제 윤동주를 생각한다면 광양시 진월면 망덕포구 무접섬 광장도 기억해둘 일이다.
광양시 망덕포구에 있는 윤동주 시비공원
윤동주와 정병욱 / 윤동주 유고의 보관 장소
정병욱의 가옥은 노후화가 심해서 개보수 작업중
지난 강의시간에 자기소개를 하던 날, 우리 문우 중에쉰 살의 젊은 문학소녀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시 낭송에 최적화된 낭랑한 목소리로 암송하였었다.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 있다. 저녁 시간의 강의였기에 그 느낌이 울컥 가슴에 와 닿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