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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Sep 20. 2020

10. 나 홀로 문학기행 ㅡ #조정래 아리랑문학관

ㅡ ‘징게맹갱 외에밋들 (김제만경 너른 들)’


날씨가 흐리다. 일기예보는 비가 내린다고 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늘에는 먹구름이 낮게 내려앉는다. 원래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문학관 방문은 부수적인 목적이었으나 이미 출발한 상황인지라 휴게소에 들러 다음으로 미룰까 말까를 놓고 한참 고민하였다. 수일 전부터 계획을 세운 터라 일단 그대로 행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초록빛이 광활하게 펼쳐진 김제평야를 따라 차를 달렸다.
한적한 들판에 자리를 잡아 동떨어진 세상에 서있는 듯한 느낌의 건물 앞에서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마친다. 붉은 벽돌 건물과 그 비슷한 색상의 보도블록이 깔려 있는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에 도착할 무렵에 가는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기 시작하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입구에서 발열 온도를 체크하고 전시관으로 들어서니, 오른쪽에 징게맹갱 외에밋들 (김제 만경 너른 들)’ 문구가 쓰여 있는 대형 패널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라고 소설『아리랑』은 표현하였다. 『아리랑』은 일제가 조선을 침탈한 대표적인 공간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 김제·만경평야이었음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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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작가는 1983년 《현대문학》에 9월호부터 원고지 1만 5천 매 예정으로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연재를 시작하여 1989년까지 6년 동안 전 10권을 완결한다. 이 소설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조선이 좌·우익 간 갈등이 여수, 순천 등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편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의 후속 작품 집필을 준비한다. 이를 위하여 1990년 《한국일보》에 2만 매 분량의 대하소설 『아리랑』를 연재하고자 자료수집을 목적으로 중국, 만주, 동남아 일대는 물론 미국과 하와이, 일본, 러시아의 연해주 등지로 광폭의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그 해 12월 11일부터 연재를 시작하여 1995년 7월 『아리랑』의 집필을 완료하였다. 아리랑은 4년 8개월이라는 시간을 거쳐 세상에 태어났다.


아리랑의 집필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의 집영사에서  『태백산맥』 전 10권 완역 출판의 계약 체결이 이루어졌다. 그러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동안 『태백산맥』에 대하여 8개의 반공 우익단체로부터 역사를 왜곡한 반공 보안법 위반자로 검찰에 고발당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양자로부터 이승만 명예훼손죄 고발이 추가되어 치안본부 대공수사실에서 수사를 받는 등 『아리랑』의 집필에 많은 피해를 받았다. 2005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태백산맥』 고소 고발 사건이 무혐의로 결정되기까지 만 11년 동안 어려움을 겪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2000년 9월 29일은 『아리랑』의 발원지 전북 김제시에서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 문학비’가 벽골제 광장에 세워졌다. 이날 조정래 작가에게 김제시 1호 명예시민증 수여와 첫 손자가 태어난 경사스러운 날이기도 다. 2003년 5월 6일 김제시에서 건립한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의 개관식이 열렸는데 생존 작가의 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과 아리랑에 이어, 그의 세 번째 대하소설인  『한강』을  《한겨레신문》 창간 10주년 기념으로 연재하여 2002년 원고지 1만 5천 매의 집필을 완료하였다. 참고로 조정래 작가의 중편소설로 『청산댁』, 『유형의 땅』, 『인간의 문』 등이 있고, 단편으로는 『빙판』, 『인형극』, 『허깨비춤』, 『두 개의 얼굴』 등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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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에 빼곡히 적힌 취재자료(좌)와 대하소설(왼쪽부터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배경으로 손자와 찍은 사진(우)



『아리랑』 이야기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세계로 유랑하는 조선 민중들의 발길을 쫓아 아리랑의 집필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조정래 작가는 지구를 세 바퀴 이상 돌았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조선은 걷잡을 수 없이 식민지로서 수탈의 대상으로 자리 잡아갔다. 곡창지대 호남평야가 지척인 항구도시 군산은 조선에서 수탈한 물산을 반출하는 대표적인 항만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 아리랑의 국내 주요 무대이다. 일제의 토지조사를 계기로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은 대도시의 인부가 되나 만주 등지로 떠나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조선 땅의 45%를 차지하는 조선 최대의 지주가 된다. 만주나 하와이로 흩어져간 민중은 새로운 터전에서 삶을 일구거나 독립군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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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제1부는 1904년부터 1911년까지 시대적 배경을 토대로 슬픈 이별의 서곡이 시작된다. 감골댁의 큰아들 방영근은 집안의 빚 20원을 갚기 위하여 ‘징게맹갱외에밋들’을 가로질러 하와이로 떠나간다.
“뱃길 수만리라는 디, 이리 갈라지면 온제나 만내질거냐.”
“엄니, 나 돈 벌어 올 때꺼정 몸 성허게 지내야 허요이.”
(1권 P.17 미국으로 떠나는 방근과 어머니 감골댁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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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공간적으로 김제의 죽산면에서 군산으로 이주하는 지삼출, 손판석, 감골댁 식구들의 이동경로를 따라가고, 계속해서 지삼출과 감골댁 식구들을 따라 만주까지 확장된다. 군산일원에서 활동하던 백종두는 자청하여 친일파가 되고 보부상 장덕풍은 잡화상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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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 헤어져 고국을 떠나온 방근과 같은 이들의 이국생활은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지닌 것언 몸띵이 뿐이고, 믿을 것도 몸띵이 뿐인디...”
“그러제. 이 타국서 몸띵이 성허덜 못해서야 아무 가망도 없응게...”
골병으로 드러누운 주만상을 간호하던 남용석과 방영근의 탄식소리이다. 함께 하와이에 건너가 생활하던 방영근 일행의 초기 생활은 노예생활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사탕수수밭의 도급제, 파인애플 농장이 도입 도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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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제2부는 1912년부터 1920년 사이에 만주 통화현, 왕정현의 감골댁 가족과 국내에서 전주, 군산의 상황, 국내에서 토지를 잃고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아, 문서가 무신 소용이 있다요. 그 논이 우리 논인 것이야 시상이 다 아는 일인디요.”
“어허, 관청서 하는 일은 문서대로만 허는 것이란 말이시, 문서가 자네 논이 아닌디 나보고 어쩌라는 것이여. 나 말얼 그리도 못 알아 묵것어! ”(4권 P.74 자작농 차갑수와 지총대 나기조실랑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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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과학적 측량기술로 땅임자를 가려주겠다는 명분으로 총칼을 앞세운 토지조사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 자작농들에게 전가되었고, 그들을 도시의 인부로 전락하거나 만주로 유랑을 떠나게 만든다. 이 무렵 만주에 가 있던 지삼출과 방대근 일행은 상투를 자르고 독립군이 되었으며, 대종교의 사상을 받아들인 송수익은 이민 동포들의 지도자로 활약하는 과정들이 묘사된다. 삼일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번지고, 김제 죽산면의 박건식과 김춘배 등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일본인 지주 하시모토 집에 불을 지른다. 친일파로 활약하던 백종두는 시위대에 맞아 죽는다.
그리고 이 시기에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끈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자 일본군은 만주지역의 조선인 마을에 대하여 무차별 방화와 학살을 감행(경신참변)하는데 이때 감골댁도 화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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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제3부는 1921년부터 1931년까지 군산의 손판석, 백남일 등 생활상과 서간도의 송수익, 지삼출의 활동을 조명하고 있다. 이 무렵 ‘불이농장’의 요시다가 김제 뻘밭을 농토로 만드는 사업이 시작된다. 전직한 농부 3천여 명이 영구 소작권을 받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갖은 학대와 허기를 달래 가며 노동을 제공한 결과, 7백50만 평의 간척지 사업이 완료된 시점에 이들 인부들에게 돌아온 경작지는 일인당 다섯 마지기(1천 평)가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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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 씨브럴 놈덜이 혀도 혀도 너무 한당게요. 아무리 즈그 왜놈덜이라고 혀도 땀 한 방울 안 흘린 놈덜헌티 우리 보담 열 배가 넘게 논얼 띠주는 법이 시상에 어디 있나요.”
“다섯 마지기에 예순 마지기먼 열두 배시, 열 두배.”
<제7권 P.237 소작지 분배에 불만을 토로하는 농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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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참변 후에 독립군은 연해주로 이동하며, 중국의 국공합작 분열로 독립군은 많은 어려움에 봉착한다. 방대근이 들어간 의열단은 사회주의 노선을 수용한다. 그런데 하와이에서는 박용만과 이승만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며 이로 인하여 하와이 이민 동포사회에 혼란이 야기된다. 이러한 와중에도 방영근은 늦은 결혼을 통하여 아들 셋을 얻으며 하와이 정착민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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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제4부는 1932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연해주에서 터를 잡고 있던 조선인들을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시기에 만주에서는 방대근이 변절한 동기를 처단하고 일본 보급대를 습격하는데 필녀, 수국, 이광님 등이 전사한다.
조선에서는 창씨개명을 비롯하여 조선어 폐지와 태평양전쟁 참여를 종용하는 강연회와 문학작품들이 줄을 잇는다.
또한 김제읍장으로 부임한 하시모토가 ‘강제징용’과 ‘종군위안부’ 문제에 앞장선다. 그러나 활주로 공사에 투입된 조선인 노무자들은 집단 학살을 당하고,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처녀들은 패망하는 일본군을 따라 물결처럼 출렁이는 최후를 맞는다.
조정래 작가는 조선이 815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기쁨 대신에 만주 벌판을 헤매는 동포의 수난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는 미완의 민족사에 대한 숙제가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조선인 후손들이 '고려인'이라는 별칭으로 1990년대 러시아 10만 명, 우즈베키스탄 20만 명, 카자흐스탄 10만 명, 키르기스스탄 2만 명을 비롯하여 벨라루스, 타지키스탄, 우크라이나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역시 나라를 잃은 슬픈 역사의 소산인 것이다.


한 시간 반쯤 전시공간을 천천히 돌아보며 일제시대에 조선 민중이 겪었을 고통, 작품이 전개되는 과정과 꼼꼼히 취재한 수첩의 기록물들을 읽으며 모든 생각이 정지되어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건물 밖으로 나와보니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바람에 잠시 처마 아래에서 기다려보았다. 그렇다고 한없이 기다릴 수도 없다. 우산을 받쳤지만 그칠 줄 모르는 장대비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빗물이 역류한다. 대책 없이 구두는 물론 온몸이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몸과 마음이 흠뻑 젖어버린 문학기행이 되었다.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은 보성군 벌교읍에 있음.
https://brunch.co.kr/@beseto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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