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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Aug 27. 2019

벌교애사(筏橋哀史)

보성여관에서 만난 태백산맥



  태백산맥 준령을 따라 남으로 뻗은 산록이 끝나는 언저리에 별교가 앉아 있다. 좌우 진영의 이데올로기에  흔들거리며 숱한 비극이 되풀이되던 시절이 흔적처럼 남아 있는 곳, 한때 4만 명을 헤아리던 고을이 현재는 1만 명도 안 되는 소읍이지만 무심한 시간들을 껴안고 그저 심심찮게 오가는 길손을 맞이한다.



   태풍 접근의 영향을 받아 강풍을 등에 업은 빗줄기가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떠난 날의 오후,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에 들려 6년간 정신없이 써내려 간 대하소설이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데, 어쩌다 그 서적이 이적으로 몰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것은 또 하나의 동족상잔의 비극의 모습이 아닐 수 없음이리라.


조정래 태백산맥의 배경 중 하나인 전남 보성군 벌교읍 보성여관




  애잔한 마음을 안고 녹차밭으로 유명한 성군의 벌교읍내 정도가(鄭都家)에서 꼬막정식을 한상 받은 뒤, 언제부터인가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에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보성여관> 1층의 개조된 찻집에서 차 한잔을 주문한다.



  여관 이층에는 미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길게 이어진 방들 네 칸을 터놓은 다다미방에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자니, 문득 윤동주 시인이 시가 쉽게 쓰여 부끄러운 생각을 갖게  했다는 그 시가 떠올랐다.



  아무튼, 조정래 작가가 태백산맥의 탈고를 끝내고 새로운 강나루에서 <아리랑> 집필에 나서게 된 소명을 접할 수 있는 실마리를 벌교에서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형성된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복합적 연결고리들을 통하여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임을, 또한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며 진행되는 것임을 느끼며 윤동주 시를 되뇌어 본다.



보성여관 이층 다다미방





쉽게 쓰여진 시   /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보성여관 이층에서 바라본 창밖 풍경


윤동주를 찾아서(광양시 망덕포구)
 >> https://brunch.co.kr/@beseto25/118

조정래 <김제시, 아리랑문학관>
>> https://brunch.co.kr/@beseto25/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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