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涵養)과 체찰(體察)을 읽으며
ㅡ퇴계 이황의 마음공부 읽기
함양(涵養)과 체찰(體察)을 읽으며
신창호 작가가 쓴 이 책 <함양(涵養)과 체찰(體察)>을 읽기 전에 일본의 한 대형서점에서 대하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난 적이 있다. 한국에서 <대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책이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를 풍미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리고 최후의 승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가리켜 흔히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3인방 정도로 이해한다. 이들은 일본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차례로 패권을 잡았던 사람들이며,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개설한 1603년부터 조정에 정권을 반환한 1867년까지 봉건시대를 흔히 에도시대(江戸時代) 라고 칭한다. 일본은 200여 년간의 전국시대를 거쳤는데, 에도막부는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는 도구로서 조선의 유학자인 퇴계 이황의 경(敬) 사상을 도입하였다.
즉 힘으로 경쟁하는 사회가 아니라 유교적 윤리인 경 사상으로 도쿠가와 정권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교육칙어 내용도 역시 이황의 경 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며 일본의 정신적 기반이 된 이 사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임을 아베 요시오 도쿄대학 명예교수가 밝힌 바 있다.
나에게 <함양과 체찰>은 이렇듯 일본의 근대화에 정신적 기틀을 제공한 퇴계사상, 혹은 퇴계라는 인물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이 책의 내용을 들여다본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회적 관계에서 서로 교류하는 연계 활동으로 체득하고 실천하기 위한 후천적 소양을 갖추기 위한 마음공부가 필요하며 그 방법은 다양하다고 말한다. 퇴계는 스스로를 뒤돌아보며 지적 소양을 쌓고 품성을 닦으며 끊임없이 성찰하는 자기 관리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함양은(涵養)은 학식을 넓혀 심성을 닦는 것이고 체찰(體察)은 몸으로 익혀 실천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의 지성인으로서의 성장은 유교적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의 공부는 20세 정도에 기초가 다져진 것으로 보인다.
사서삼경-사서는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말하고 삼경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을 말함-의 마지막 단계인 역경은 주역(周易)이라고도 하는데, 이 주역을 공부할 무렵 퇴계는 식음조차 거르며 <주역>을 뜻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는 34세의 늦깎이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40세에 사헌부 지평에 이른다. 그러나 영예로운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았고, 여전히 마음공부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43세부터는 벼슬할 마음이 적어 물러나 쉬기로 뜻을 정했음에도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그를 불러들였다. 45세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지만 여전히 퇴계를 찾았다. 그가 풍기군수로 재직 중에 요즘으로 비교하면 사립대학에 해당하는 서원인 소수서원을 세우는데 기여한다. 이를 통하여 조선 유교사회의 학문적 부흥과 교육사업의 주춧돌이 놓이게 된 계기가 된다.
또한 53세에 성균관의 수장인 대사성이 되어 교육에 대한 각성을 촉구한다. 이 무렵 사단칠정의 단초가 된 정지운의 <천명도>를 개정한다. 그는 편지를 통하여 지인, 후학들과도 교류를 지속하는데 특히 고봉 기대승과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황이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유명한데, 이것은 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변론 후 퇴계는 그의 학식을 존중하여 대등한 입장에서 대하였다. 또 남시보와의 편지에서는 마음공부를 하며 조급증을 일으켜 ‘싹을 억지로 잡아당겨 성장을 도우려’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발생함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함양과 체찰은 유교의 근본 취지로 자연의 이치와 세상의 일이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퇴계는 기명언(기대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무르익지 않은 공부로 높은 관직을 바라지 말며 명예욕을 경계하였다. 정자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퇴계는 몸으로 부딪히는 모든 일들이 공부가 됨은 물론, 공부에는 마침표가 없으며, 앎과 행동을 분리하지 않았고, 공부는 짧은 기간에 완성되지도 않고 도약하지도 않는다는 생각을 드러낸다.
또한 퇴계는 하나의 일을 할 때에는 다른 일이 있더라도 하나의 일에 마음을 전념하고 두 갈래로 쓰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공부를 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리는 실천의 지혜로서 훌륭한 선비는 올바른 인간의 길에 대해 들으면 그것을 힘써 실천하는데, 공부를 조금 했다는 선비는 경우에 따라서 실천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며, 공부가 부족한 선비는 실천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웃고 조롱을 한다고 하였다. 이는 나만의 지식 감옥에 갇히는 것을 경계한 것이리라. 이렇게 퇴계는 일상의 평이하고 명백한 곳에서 이치를 발견하기를 갈구하였고, 나아가 마음공부에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어쩌면 사회적 처세와 성공을 위한 도구로써 공부를 지향하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공명이 크게 울리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