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바우 Jan 24. 2020

철부지와 세뱃돈

부끄럽고 감사한 세뱃돈의 추억


아직 동창이 밝지도 않은 꼭두새벽에 불도 켜져 있지 않은 집에 가서 세배를 드리겠다고 문을 두드렸으니 얼마나 웃기고 철딱서니 없는 짓인가?



설날이 가까워지면 시골에서는 동네 어른들이 읍내 시장에 가서 제수용품도 사고 가족들의 설빔 등을 준비하느라고 바빠진다. 나 어린 시절, 설날 아침에 들뜬 마음으로 설빔을 입고 집집마다 큰집-종가-에 모여서 차례를 지내고, 오후가 되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가가호호를 돌면서 새해 인사를 드리러 온 동네 어르신을 찾아다니는 게 순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간 장성한 청장년이 된 이후 일이고, 그보다 어린 조무래기들은 어른들 곁을 지키고 있다가 일가친척들이 찾아오면 큰절을 하고 세뱃돈을 받는 재미로 명절이 가까워지면 설레는 마음으로 멀리 외지에 나가 있던 가족들을 손가락을 꼽으며 설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나에게 매년 설날이 되면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는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되는 이가 떠오른다.

오십여 호가 살던 우리 마을은 강씨 집성촌으로 절반 정도는 강씨 성을 가졌고, 그 외 이씨와 박씨가 열댓 가구, 김씨는 우리 아버지 3형제 등 대여섯 가구에 손씨, 한씨 성을 가진 이들이 몇 가구였다, 그래서 추석에 성묘를 하려면 아버지와 우리 남자 형제들은 선영이 있는 김씨 집성촌 마을까지 십여 리를 걸어가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평소에 아버지는 당신보다 손아래인 옆집 손씨 아저씨, 윗집의 한씨 아저씨와 삼인방을 이루어 호형호제하면서 이웃사촌으로 잘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 보다 아버지의 미각이 뛰어났던 것 같다. 나 역시 아버지를 닮았는지 음식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어서 우리 아이들도 아빠가 해준 음식이 맛있고 할 정도이다. 아무튼 아버지가 약주를 즐기셨던지라 집안에서 종종 가용으로 동동주를 빚어 드셨는데, 날씨가 궂은날은 옆집 손씨 아저씨들을 불러서 삼인방이 도란거리며 즐기시던 모습이 선하다.

우리 마을 앞에는 넓은 벌판이 있고 뒷산을 배경 삼아 마을이 앉아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었다. 마을 앞 벌판을 가로지르며 강이 하나 흐르고, 강에서 개천을 통해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물길을 만들었는데 그 수로 중간에 작은 방죽이 하나 있었다. 이 무렵에는 농약도 구경하기 힘들어서 벼를 심으면 세 차례 정도 김매기-제초작업-를 하던 시절이었다.


추수가 끝난 늦가을날, 아버지 3인방은 개천 물을 우회시켜 흐르게 하고, 방죽 물을 퍼내고 진흙을 걷어낸 다음 미꾸라지를 잡았다. 양동이며, 큰 질통에 넘치도록 잡혀 올라왔다.

그날 오후에 미꾸라지는 소금을 뿌려 씻은 후, 가마솥에서 끓인 다음에 돌절구에서 으깨어 잔뼈를 채로 걸러내고 다시 시래기들을 넣고 푹 고와서 온 동네 사람들이 먹을 만큼의 양으로 한 솥 가득했다. 삼인방이렇게 우애 좋게 지내시는 그런 관계였다.

어느 설날 아침, 부모님은 동도 뜨기 전에 일어나서 아침 차례를 지낼 준비를 하니 어린 우리도 덩달아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나하고 세 살 터울인 여동생은 둘이 설빔으로 단장하고 옆집 손씨 아저씨 집으로 건너갔다.

“용산 아재, 저 배 왔어요.”
“응? 솔바우 왔냐?”

아직 동창이 밝지도 않은 꼭두새벽에 불도 켜져 있지 않은 집에 가서 배를 드리겠다고 방문을 두드렸으니 얼마나 웃기고 철딱서니 없는 짓인가? 그러나 아저씨 내외는 이렇게 개념 없는 어린것들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시고 군말 없이 호롱불을 밝힌 후에 주섬주섬 옷을 입고 세수도 못한 채, 아저씨 내외가 나란히 앉아서 세배를 받은 후 세뱃돈을 주셨다.

다음 목표는 한씨 아저씨네 집이다. 이 댁도 아직 기상 전인지라 마루에 올라가 문을 두드리며 잠자는 아저씨 내외를 깨웠다.

옥구 아재, 배 왔는데요.”

그리고 세뱃돈을 받아냈다. 십원이나 이십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초등학교 일 이학년 때쯤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때만 해도 아직 시골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뒷통수가 간지러울 짓이었는데 그때는 그저 세뱃돈 받을 생각에 눈이 어두워 지각없는 행동을 했고,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내가 말씀을 안 드렸으니 우리 부모님은 나중에라도 이런 사을 들으셨을까 모르겠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설날이 되면 아직도 잊히지 않고 이렇게 어린 날에 세배 다니던 기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오늘부터 명절을 보내려고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을 만나려고 먼 길을 떠나는 이들이 많은데 교통체증이 심하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설을 잘 쇠고 돌아오시기 바라고, 명절증후군으로 고생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올해는 좋은 추억을 하나씩 갖고 제자리로 돌아오시기를 기원해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아내의 공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