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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념 섞인 자아성찰

by sewon

관공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처음엔 죽도록 하기 싫었다. 수많은 종이를 인쇄하고 파쇄하고 인쇄하고 또 파쇄하기를 반복. 단순한 일이었지만 다른 생각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뽑아야 할 문서를 클릭하고 설정하고 인쇄 버튼을 누르길 반복, 그 틈 사이에는 잡다한 기억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이미 예상했었다. 여긴 발전도 없어. 단지 안정적일 뿐이잖아. 나와는 맞지 않아. 하고 싶지 않아. 딱 일주일간 든 생각이었다. 한주가 지나자 1000장이 넘는 인쇄물에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꽤나 집중해서 포스트잇을 하나씩 붙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스스로 소름이 돋았다.


원래는 서울에 갈 생각이었다. 생활이 너무나 무료하고 나태해서 환경을 바꾸고 싶은 것이 첫 번째 이유, 두 번째는 독립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상경 일주일 전, 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하시는 엄마친구의 권유로 교육청 아르바이트 자리가 들어왔고 그 후로 엄마는 서울에 가는 것을 반대했다.


가지 않겠다고 하고 싶지 않다고 대들었고 말다툼도 많이 했다. 결국 어떤 일인지만 들어보고 오라는 엄마 말에 그러기로 합의했고 면담만 다녀와서 절대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놀랍게도 그 다짐은 면담 중 '다음 주부터 출근 가능하지?'란 주무관님의 질문에 자신 없는 '네...'와 함께 무너져버렸고 그렇게 일주일 넘게 출근 중이다.


맛없던 교육청 급식밥도 오늘은 이상하게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 손에 잡기도 어려운 몇백 장의 헝클어진 서류 뭉치를 책상에 몇 번 드르륵, 탁탁. 치고 나니 제자리를 찾아간 종이를 보며 30년 행정업무의 달인인 주무관님이 존경스러워 보였다. 또한 수천 장의 서류 한 귀퉁이에 깔끔하게 붙여진 한 장 한 장의 포스트잇을 보며 왠지 모르게 뿌듯하기까지 했다.


퇴근길에 밀면 한 그릇 시원하게 먹고 기분 좋게 카페에 들어서는데 문득 우울해졌다. 내가 너무 빠르게 적응해 버린 것이 허무했다. 돌아보니 6월이었다. 하고 싶었던 건 정작 따로 있는데 하기 싫었던 일에 적응해버리니 무섭기도 하고 또 이러한 생각이 확장되어 내 20대가 이렇게 적응만 하다 지나가버리는구나라는 생각에 온 몸이 쑤시고 갑자기 아파왔다.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


가장 예쁠나이엔 실컷 사랑해봐야 한다(고 지코가 말했)는데 나는 대체 무엇과 사랑하고 있는가. 매일 하루 9시간을 A4용지와? 아니면 취업준비를 위한 (원하지도 않는) 토익공부, 인적성 공부랑? 2년간 열심히 모은 200만 원으로 산 DSLR 카메라는 한번 쓰고 처박혀 있고 예쁜 영상을 만들고 싶어 배운 편집 수업도 모두 맥 한번 못쓰고 있다.


카메라 들고 멀리 오랫동안 여행도 가고 싶고 예쁜 동영상도 만들고 싶다. 그런데 이미 지금의 삶에 적응해버려서 선뜻 나서기가 두렵다. 내가 게으른 걸까, 이 모든 건 핑계일까. 어떻게 살고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지금 이 시점이 가장 내 인생의 방향이 이대로 흘러갈까 두렵고 무서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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