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제의祭儀로의 초대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by 송동섭

작가 한강을 알게 된 것은 그녀가 소설『채식주의자』로 지난 2016년 맨 부커상을 받았을 때다. 당시 그녀의 ‘맨 부커상’ 수상 소식에 그런 상도 있나 싶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였다지만 국내 작가들의 이름을 딴 여러 문학상들은 알고 있었어도 ‘맨 부커상’은 생소하고 낯설었다. 해외에서 주는 문학상은 오직 노벨 문학상이 전부라고 생각했고 그것만이 수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맨 부커상’은 노벨 문학상과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권위 있는 문학상이라고 한다. 아무튼 당시에 작가 한강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2016년 당시 맨 부커상 수상 소식에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했고 3편으로 구성된 연작 소설집 『채식주의자』에 <채식주의자>를 당연히 먼저 읽게 되었다. ‘맨 부커상’이 영어로된 소설 중 문학성을 인정하여 부여하는 상인 점을 고려한다면 『채식주의자』는 이야기로써의 서사가 갖는 기표보다는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기의의 문학성에 중심을 둔 소설인 점이 수상하는데 높이 평가받은 듯하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이전에 읽었던 『82년생 김지영』의 다른 버전처럼 느꼈는데, 가부장적인 사회 환경에 대한 지극히 소극적인 저항으로 채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였다, 소설은 이야기 중심의 전개를 최대한 절제하고 이야기의 상징성이 강조되어 그리 쉽게 이해되지 않았고 뒤에 이어지는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까지 읽고자 하는 동기가 부족했던지 고스란히 책장의 장식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이후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제일 먼저 꺼내 본 책이었고 이전에 읽지 않았던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도 읽게 되었는데 <채식주의자> 보다는 서사 중심의 전개에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가 의도한 상징_채식, 몽고반점, 나무, 불꽃 등_에 대한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기까지 미치지 못해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었다.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이어 읽은 것은 『희랍어 시간』『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순이었다. 스웨덴 한림원에서는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하였다. 이 시상 평을 기준으로 4편의 작품을 가름해 보면 『채식주의자』는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희랍어 시간』은 그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강렬한 시적 산문으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표현하였는데, 그중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는 서사라는 산문을 시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녀의 작품에 드러난 특징적인 표현 방식인 시적 산문을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인간 삶의 연약함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소년이 온다』와『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문학의 갈래(일명 장르)를 나누는 방법으로 대개 시를 서정이라 하고 소설을 서사로 구분한다. 그 나눠진 갈래를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는데 서정을 세계의 자아화라고 하고 서사를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고 한다. 그래서 작가 한강의 작품을 시적 산문이라고 할 때 서사를 서정적으로 표현하였다는 말이면서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 아닌 그 자아와 세계의 대결을 다시 자아화하는 서정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 『소년이 온다』와『작별하지 않는다』는 80년 5.18 민주화 운동을 48년 4.3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설이라는 서사 속의 인물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세계(환경)와 대결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그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인물들로 그려가고 있다면(그래서 그 인물이 주어진 세계 속에서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주로 표현하고 다루었다면) 그녀의 작품에서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 혹은 작품 속 인물이 주어진 세계(환경)와의 대결에서의 극복을 작품의 무게 중심으로 삼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인물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세계 속에서 연약한 존재로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세계가 가하는 힘에 의해 무차별적인 상처를 받은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작품 속에 인물들에게 주어진 세계(환경)라는 것이 인물들이 그 세계와 대결할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 그 세계의 힘에 의해 치명적인 고통을 받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그 상처 받은 존재라는 세계를 다시 자아화_작가 스스로 그 고통에 동화되어 그것을 독자에게 전달하려는_하여 그녀의 작품이 시적 산문이라고 평가받는 이유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과 같이 『소년이 온다』와『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치명적인 상처의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 지난 역사의 사건을 소재로 다루면서도 그녀의 소설은 역사적인 사실을 나열하는데 할애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 역사적인 시간 속에서 깊은 고통 가운데 있었을 혹은 있었던 그 누군가의 가름할 수 없는 상처에 대한 집요한 공감을 통해 그들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데 집중한다. 이 점에서 작가 한강은 『채식주의자』와『희랍어 시간』에서 개인적인 아픔을 표현하였다면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공동체의 아픔으로 확장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그 전환의 출발점으로 자신의 유년 시절의 삶의 경험이 있었던 80년 광주로 시작한 것이고 다음으로 48년의 제주로 잇고 있다. 소설의 제목에서도 광주를 배경으로 한 80년 5.18은 소년이 ‘온다’이고 그 보다 30여년 전의 사건인 제주 4.3은 작별하지 ’않는다’로 한 것이다. 어쩌면 광주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고통이 작가에게 (찾아) 온 것이라면, 제주의 그것은 작별할 수 없는 그래서 작별하지 않거나 작별 되지 않는 것으로 두 사건이 모두 그녀의 작품에서 의식하여 의도할 수 없는 ‘꿈’과 같이 다가와 작별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인다.

작가 한강의 작품의 특징으로 시적 산문이라는 표현에 맞게 그녀는 작품 속 소재를 통한 상징을 하나의 작품에서는 물론이고 작품과 작품 간에 연결되어 반복하여 사용되면서 그 의미의 상징성을 확장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주로 사용되는 소재로 꿈, 눈雪 또는 눈眼, 새, 불꽃, 나무. 초(촛불) 등인데 주로 1음절의 단어를 그의 작품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에서는 그 단어의 의미는 중의적 해석이 가능하게 사용된다. 『소년이 온다』에필로그에서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여기서 눈은 우선 길을 덮은 눈이고 다른 하나는 앞선 소년을 따라갈 수 있게 한 눈이다. 소년이 걸었던 길을 눈이 덮여 있는 길이라고 표현하므로 그 숭고함을 백색의 눈으로 상징하여 고결함의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소년이 앞서간 눈 덮인 길은 작가로 하여금 따라갈 수 있는 이정표로써의 기능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눈에 대한 상징성은『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이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작별하지 않는다』가 작가가 쓴 『소년이 온다』의 후작임을 가름할 수 있는 대목에서 연상할 수 있다.

그 꿈을 꾼 것은 2014년 여름, 내가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작가는『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눈은 아름다움의 상징이면서 단절의 상징이기도 하며 무언가를 덮어 지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소년이 온다』의 소년이 걸었던 길의 눈과 같이 눈에 밟힌 발자국은 어디로 안내하고 인도하는 이정표로의 기능으로 사용하고 있다.

온다. / 떨어진다. / 날린다. / 흩뿌린다. / 내린다. / 퍼붓는다. / 몰아친다. / 쌓인다. / 덮는다. / 모두 지운다.


경하야

인선이 나를 불렀다.

내가 디딘 데만 딛고 와 (중략)

발자국 보여?

보여 대답하며 나는 인선이 만들어놓은 오목한 눈구멍으로 발을 일어 넣었다

‘온다’로 시작해서 ‘덮는다’ ‘모두 지운다’로 이어지는 표현에서 작가는 눈이 내리는 형태를 온다~덮는다까지 눈에 대한 관찰된 사실을 나열하고 있다면 그 끝을 지운다로 그 눈의 의미를 하나로 묶어 단정하고 있다. 그리고 인선이 경하에게 나무를 심을 땅으로 안내할 때 눈은 인선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이정표로 기능하는데 이것은 앞서 『소년이 온다』에서 ‘소년이 앞서 나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와 같은 의미로 연결 지어 볼 수 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또 다른 상징적인 소재로 사용된 것으로 초(불)를 꼽을 수 있다.『소년이 온다』에서는 초는 죽은 시신을 추모하는 도구로 사용되면서 부패한 시신의 냄새를 제거하는 기능의 소재로 사용되었다면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초(불)는 좀 더 상징적 의미를 구현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찰랑이는 촛물을 심지로 발아들이며 타오르는 불꽇을 나는 보았다 공방 난로의 격렬하던 불꽃과 비교할 수 없이 작고 고요한 것이었다. 너울대는 불꽃 안쪽에서 파르스름한 심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맥이 뛰는 씨앗 같았다.

지금? / 금방 다녀올 수 있어 / 너무 어두운데 나는 말했다 / 초가 얼마 안남았을 텐데 / 아직 괜찮아, 인선이 말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의 초(불)는 작고 고요한 것으로 맥이 뛰는 씨앗과 같다고 하여 역사적인 사건에서 희생당한 영혼이면서 그 생명력이 약해 외부 환경에 쉽사리 꺼질 수 있는 존재로 상징되며 이것은 기억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희미해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꺼져가는 것, 사라지는 것, 작별 되어지는 것에 대해 마치 작심하듯 다음과 같이 소설을 마무리하고 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 처럼


작가 한강은 꺼진 혹은 꺼졌다고 생각하는 초에 불을 붙이고자 성냥을 그었으나 성냥은 부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부러진 성냥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작별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그리고 부러진 성냥으로 불꽃이 솟았고 아주 미약하고 연약한 새의 날개가 퍼덕이는 것처럼 불이 일렁인 것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화자 경하는 2014년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내고 이제 다시 아주 작은 불꽃을 이어 갈 것으로 소설의 끝을 맺고 있지만 그 작은 불꽃은 작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맥이 뛰는 씨앗 같은 출발점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 한강은 노벨 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면서 아름다운가’라고 하며 자신이 고민하는 세계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폭력과 아름다움이라는 극단의 가치가 작가와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 속에 공존하는 것에 대한 깊은 고뇌를 작품을 통해서 풀어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폭력과 아름다음을 하나의 양 끝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작품은 아직 그 폭력에서 아름다움으로 가는 지난한 여정 중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녀의 작품이 집요하리만치 폭력의 상처를 고통스럽게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어 작가가 열어 놓은 고통에 동참하기가 힘들다는 게 작품을 읽는 사람들의 공통되는 감상평이다. 하지만 작가는 아직 치유되지 않는 폭력의 상처에 대해 본인 스스로 동화되어 체감한 역사적인 트라우마를 작품을 통해서 고통의 제의祭儀 의 문을 열어두고 있으며 작품을 통해 우리를 그 제의의 문턱을 넘어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한강은 『작별하지 않는다』의 작가의 말에 다음 소설은 사랑에 대해 쓰고 싶다고 했고 이것_『작별하지 않는다』_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했다. 이 말은 아마도 그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어쩌면 연약한 존재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존재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공감과 희생 혹은 헌신이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의 폭력 속에서도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아름다운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다음 작품에서 작가 한강이 폭력의 세계에서 좀 더 아름다운 세계로 한 발자국 내디뎌 고통의 제의를 마치고 아니 그 고통의 제의 가운데에서라도 좀 더 아름다움을 위한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노래가 시작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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