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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히 잊고 있던 추억 한 자락

by 베존더스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4월이 되면 우린 이사 간다. 9년 전 첫째 듬직이 손을 잡고 둘째 테디베어를 품에 안고 이곳에 이사 왔다. 그 사이 셋째 ‘다운천사’도 태어나고, 고사리 같았던 듬직이의 손은 남편 손처럼 커졌다. 둘째 테디베어는 품을 떠나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벽에 그려진 그림만이 꼬꼬마 시절 삼 남매를 기억했다.


짐을 정리하기 전 집을 쭉 둘러봤다. 까르륵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거실, 꼬질꼬질한 녀석들을 씻기던 욕실, 돌아서면 배고픈 녀석들이 들락거리던 부엌, 흩어진 장난감으로 발 디딜 틈 없던 아이 방에는 삼 남매 웃음소리가 있었다. 쭉 둘러보던 눈에 낡아진 서랍장이 들어왔다. 평소에 잘 열어보지 않던 서랍장을 끼익 열었다.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양팔에 힘을 주며 물건을 끄집어냈다.


묵은 짐들 사이로 잊고 있던 추억이 툭 떨어졌다. 삼 남매 육아 일기장이었다. 짐을 싸다 말고 쪼그려 앉아 첫 장을 펼쳤다. 듬직이의 작은 발 도장, 테디베어의 처음 잘랐던 배넷 머리카락, ‘다운천사’가 태어난 병원에서 채워줬던 이름 적힌 팔찌. 좋은 거름을 주지 못한 미안함이 마음 가득했다. 맏이라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듬직이가 애틋했다. 가운데 껴서 아등바등 테디베어가 안쓰러웠다. 자주 아팠던 ‘다운천사’는 가여웠다.


내가 느끼는 안쓰러운 이면에는 감동, 축복, 선물로 채워져 있었다. 남편과 똑 닮은 듬직이를 처음 품에 안았던 순간의 감격이 있었으며, 첫째 이후 4년 만에 찾아온 둘째 테디베어는 축복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다운천사’ 셋째 딸은 12월에 태어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엄마’라고 처음 듣던 날, 첫 이가 올라오던 날, 첫발을 내딛던 날의 추억이 새록새록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쥐가 난 다리를 한참 붙들고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나보다 훌쩍 커버린 듬직이를 올려다보며 팔을 뻗어 등을 쓰다듬었다. 테디베어를 꼭 안았다. 작은 팔로 내 다리를 감싼 ‘다운천사’의 작은 온기가 느껴졌다. 아등바등 살아내느라 돌보지 못한 마음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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