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희와 지내는 시간은 평범하지 않았다. 다희를 낳은 순간부터가 모험이었다. 건강하지 못해 병원을 자주 가야 했다. 심장 수술을 했고, 병원 입원도 잦았다. 매년 가던 가족여행도 못 가게 됐다. 다희의 물리치료, 놀이치료 그리고 병원을 다녀야 했기에 내 시간은 없었다. 친구 조차 만나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렸다. 다희는 면역력이 약했다. 항상 신경 써야 했기에 큰 아이 친구가 자유롭게 놀러 오지 못했다. 어쩌다 친구가 오는 날에는 온 신경이 곤두섰다. 예민해진 엄마에게 큰 아이는 불만이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내 삶이 고단해 큰 아이 마음을 읽어주지 못했다.
둘째는 동생을 돌보는 엄마가 즉각적으로 반응해 주지 않아 스트레스받았다. 그런 둘째의 짜증이 늘어갔다. 받아주지 못한 내 잘 못이었다. 못난 내 탓을 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항상 마음이 무거웠던 건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까지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지 않은 일을 통해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일도 있다. 다희로 인해 만나게 된 마음 따뜻한 사람들, 같은 다운 천사를 키우는 엄마들과 공감이었다. 다희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세상에서 난 더불어 나눔에 대한 삶을 생각하게 됐다.
아직도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하나의 일이 있다. 5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일이다. 집 앞 빵집에 가는 나에게 누군가가 어눌한 어조로 “아줌마!”라고 크게 불렀다. 뒤 돌아보니 15세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친 아이는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더 큰 목소리로 “용인 에버랜드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해? 나 오늘 중으로 가야 해.”라는 아이의 말에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당황한 나는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와 며칠이 지나는 동안에도 그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버스 노선 표를 보며 설명해 줄걸. 내가 ‘이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잘 몰라 미안해’라는 말이라도 건네었더라면. 마음의 후회로 지냈었다. 아마도 어눌한 아이의 자립심을 위한 여정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 아이의 엄마는 뒤를 쫓고 있지 않았을까? 다희의 엄마가 되고 나니 과거의 나의 행동이 왜 그랬을까? 반성하며 잊을 수 없는 미안함으로 가득하다.
다희가 알려준 세상이었다. 두 아들의 엄마로 살았더라면 몰랐을 다른 이면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음가짐의 변화였다. 따뜻한 시선으로 보게 됐다. 내 마음의 크기가 커져 갔다. 더 나아가 부모의 마음에 같은 공감 되었다. 사실 난 건강하지 못한 다희를 바라보며 주기적으로 우울함이 왔다. 가라앉는 기분을 걷잡을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슬픈 음악을 들으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약한 다희가 건강하기만을 바랐다. 입원으로 삶이 고단 했다. 힘들었던 내 삶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다.
글리코 영양소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다희의 건강이 호전되어 갔다. 건강해져 가는 다희를 보며 마음이 덜어지는 걸 느꼈다. 병원 가는 횟수도 줄었다. 내 탓을 하며 연민에 빠졌었던 마음은 서서히 녹아졌다. 다희는 아직까지 말을 못 하지만 말이 느리면 어떤가, 기저귀를 아직 못 떼면 어떤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면 해맑게 웃는 모습만으로도 감사하게 된다. 함께 지내는 이 순간 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 다희와 지내오며 무엇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내 생각에 달려 있었다.
다희가 건강해지며 큰 아이는 더 이상 내 눈치를 보지 않고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온다. 친구가 자유롭게 드나드는 집이 되었다. 둘째는 엄마의 관심에 충족감을 느끼게 되었다. 나만의 시간을 챙기게 됐다. 날씨가 화창하면 우리 가족은 밖으로 나간다. 두 아들은 자전거를 타며 앞으로 쭉 나아간다. 다희는 엄마, 아빠의 양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다. 비가 오는 날에는 창문 밖으로 들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부침개를 부쳐 먹는다. 이렇게 우린 평범해져 갔다. 생각의 차이가 평화롭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