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독일 음대에서 만났다. 이상형에 가까웠던 남자는 훤칠한 키에 딱 버러 진 어깨가 넓었다.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가 오늘부터 1일이야 하며 사귀게 됐다. 사랑 가득한 눈으로 “우리 1년 후에 결혼하자” 라며 말하는 달콤한 남자였다. 그는 매일 아침이면 나와 함께 학교에 가기 위해서 데리러 왔다. 감수성이 풍부한 남자는 핸드폰을 통해 감미로운 목소리로 “창문을 열어다오” 라며 세레나데를 불러줬다. 창문 밖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그에게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서로 다툰 후 떨어져 있기라도 하면 단숨에 달려와 미안하다고 말하던 그였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밤에 내게 전화를 걸어 책을 읽어주었다. 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았다. 겨울이면 추위에 벌벌 떠는 나에게 코트를 벗어주었다. 추위를 나보다 더 탄다는 사실을 결혼하고 알았다. 우리의 연애는 1년을 채웠다. 결혼을 앞두고 새로 생긴 레스토랑에서 남자 친구는 리미티드 반지를 끼워주며 절절한 편지를 읽어주었다. 그렇게 프러포즈를 받았다. 나보다 먼저 눈시울이 붉어졌던 그와 만난 지 딱 1년 되는 날에 결혼했다.
결혼 생활은 달랐다. 20년 넘게 남남으로 살다 만난 우리는 생활 패턴이 맞지 않아 자주 싸웠다. 사랑이 뚝뚝 떨어지던 눈에는 레이저가 발사됐다. 첫 아이가 뱃속에 이미 찾아왔는지도 모르고 우린 열심히 싸웠다. 산부인과에 가서야 임신 6주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전날 남편과 진탕 싸우고 마음이 상한 상태였지만 남편은 내 기분은 안중에도 없었다. 미안하다는 사과가 먼저 아니었을까? 2년 만에 생긴 아기에 남편의 입 꼬리는 내려올 줄 몰랐다.
휴전협상에 들어갔다. 남편과 나는 태어날 때 엄청 컸다고 한다. 우리의 아기도 클까 봐 걱정이었다. 작게 낳고 싶은 마음에 식단 조절을 철저히 했다. 좋아하던 단 음식도 참아가며 절제했다. 임신으로 몸의 변화는 계속되고, 징그럽게 변해가는 내 배를 보며 우울했다. 내 슬픔을 알아챈 남편은 달콤한 젤리 향이 가득한 가게에 데려갔다. 환하게 웃으며 반기는 가게 주인아주머니는 뱃속의 아기 태명을 부르며 나에게 건강하고 행복 하라며 맛난 젤리를 선물로 줬다. 어리둥절한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짓는 남편을 볼 수 있었다. 남편의 작은 이벤트였다. 남편은 태교를 나보다 열심히 했다. 클래식 음악을 선별해서 들려주었다. 열 달 내내 산부인과도 같이 다녔다. 첫아이가 태어나던 날 남편은 나보다 더 감동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씨도둑은 못한다더니 아이는 남편과 똑 닮았다.
둘째는 4년 만에 찾아왔다. 남편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4.2킬로그램의 둘째를 어렵게 낳고 내 골반은 일 년 내내 아팠다. 말 그대로 개고생 한 난 더 이상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2년 후 임신 테스트기에는 두 줄이 아주 선명했다. 자고 있는 남편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집어던졌다. 남편은 화들짝 놀라며 “왜? 왜? 무슨 일인데?”라며 임신테스트기를 집어 들었다.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배시시 웃는 남편이 얄미웠다.
나에게 세레나데를 불러주던 오빠는 더 이상 없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딸에게 동요를 불러주는 아빠만 있을 뿐. 사실 서운하다. 딸을 바라보는 눈빛 반만이라도 나 좀 봐줬으면. 그래도 서운하다고 푸념만 할 수 없다. 내 생일은 기가 막히게 잘 챙긴다. 그 덕분에 아이들 역시 엄마 생일을 중요시 여긴다. 남편과 나는 한 살 차이다. 남편은 1980년생 7월생이고 난 1981년 3월생이다. 독일에서는 만으로 생일을 챙긴다. 내 생일 3월이 되면 7월까지는 남편과 동갑이 된다. 난 4개월 동안은 우린 친구다 라며 "야!!"라고 부르며 까분다. 남편은 그마저도 귀엽다는 듯 내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린다. 풋풋하고 가슴 설레는 마음은 이젠 없다. 빛바랜 사진처럼 편안해진 남편과 결혼 14년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