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 천사 딸을 낳고 내 인간관계의 폭은 넓어졌다. 두 아들 때 보다도 더 글로벌한 인간관계를 맺게 됐다. 독일에서 다운 천사를 키우지만 독일 엄마들과의 소통은 한계가 있었다. 독일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독일 정서는 여전히 어렵다. 정서가 맞는 육아 동지가 있었으면 바랐다. 한국 엄마들을 만나기 위해 블로그를 시작했다. 블로그를 통해 처음 만난 한국 엄마는 미국에서 내 딸과 같은 다운 천사를 키우고 있었다. 해외에서 다운 천사를 키운다는 공통점으로 1년 넘게 블로그로 소통했다. 그 엄마는 인스타그램에 더 많은 엄마들과의 소통을 위해 블로그를 그만뒀다.
그 엄마와의 인연을 이어 나가기 위해 나도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그곳에는 블로그보다 많은 다운 천사 엄마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 미국, 캐나다 등 다양했다. 해외에 사는 한국 엄마들에게는 동질감이 느껴졌다. 인스타그램으로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서로 이야기하며 힘이 됐다. 그중 찐 소통을 하는 엄마도 생겨났다. 더 자주 연락하기 위해 카톡으로도 연결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때로는 통화를 했다. 한국, 미국, 캐나다 시차는 제각각이라 연락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어쩌다 통화가 되면 1시간은 기본이었다.
인스타그램을 하며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사람 모인 곳은 오해가 있기 마련이었다. 소수의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나는 인스타그램을 접었다. 인스타그램을 그만둔 몇 달 동안 ‘내 딸이 큰 것만큼 다른 아이들도 많이 컸을 텐데’ 궁금했다. 마음 따뜻한 소통을 하던 엄마들 얼굴이 떠올랐다. 도망가듯 인스타그램을 그만둔 터라 다시 찾아 팔로우 신청하기가 머뭇거려졌다. 가장 연락하고 싶었던 다운 천사 선배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팔로우 신청을 했다. 변함없이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상처받아 소심했던 내 마음에 새싹이 돋듯 새살이 돋아났다.
나는 다운 천사 딸과 함께 하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탈 때가 많았다. 건강히 잘 크는 딸을 보며 감사하다가도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모습에 속상했다. 매일 먹어야 하는 갑상선 약을 거부하는 날에는 내 신경은 곤두섰다. 기저귀 떼기가 잘 되다가도 어느 날에는 잘 되어지지 않아 화가났다. 언제까지 기저귀를 찰 건지. 그럴 때면 육아 동지는 어찌 알고 나에게 연락해왔다.
얼마 전에는 캐나다에 있는 다운 천사 엄마와 연락이 닿았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만났지만 각별했다. 몇 달에 한 번 연락이 닿아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다. 그 집 셋째와 우리 집 둘째가 동갑이고, 막내들끼리 동갑이라 서로 공통점이 많았다.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만 4살인데 2중 언어라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건가?” 라며 내 고민을 털어놨다. “말을 못 함으로 더 세상에 때 묻지 않고 순수할 수 있는 거야, 어찌 보면 우리의 영보다 두 아이들의 영이 더 맑고 깨끗해 말과 행동이 더디지만 찬양에 맞춰 우쿨렐레를 치는 걸 보면 음악에 달란트를 주셨을 거야”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며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다운 천사의 모습으로 보낸 진짜 천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을 통해 받은 긍정의 힘은 나처럼 롤러코스터를 타는 또 다른 지인에게 흘러갔다. 천천히 가는 다운 천사의 시간을 함께 하는 엄마들은 배나 더한 노력을 하며 인내를 한다. 그 인내의 한계를 느낄 때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 다운 천사 딸을 낳고 4년이란 시간 동안 외롭지 않았던 건 마음 따뜻한 육아 동지들 덕분이다. 난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