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천사’ 딸은 다섯 살이 됐다.
요즘 딸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사과를 먹으며 한국말로"맛있어"라든지, 목이 마르면 물이라는 독일단어 “바써(Wasser)“를 말한다. 시기적절하게 표현해 내는 모습이 놀랍다. 사실 난 고민이 많았다. ’두 가지 언어가 가능할까? 두 가지 언어라 말이 엄청 느린 게 아닐까?‘라고. 두 아들도 두 가지 언어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마다 ‘모국어를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닐까?’라는 마음의 소리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더군다나 ‘다운천사’ 딸을 위해서는 주 언어가 독일어가 돼야 하는 게 맞았다. 언어치료 선생님마저도 주 언어가 독일어야 한다고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모국어를 포기했다가도 ‘아니야, 아니야 ‘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능성을 열어두자며 마음을 다잡았다. 갈등하는 내 모습에 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천천히 성장하고 있었다.
‘다운천사' 딸이 말을 트이기까지 우린 특별한 언어로 소통했다. 특별한 언어는 게베어덴스프라헤(Gebärdensprache)수화다. 수화를 배우게 된 계기는 딸이 세 살 때 유치원에 가면서부터다. 딸과 원만한 소통을 위해 유치원 선생님은 딸에게 수화를 가르쳤다. 딸은 수화를 통해 선생님과 소통을 시작하게 되며 그 안에서 더 많은 걸 배워나갔다. 유치원에서와 같이 집에서도 동일해야 했기에 우리 가족은 매일 다섯 개의 독일어 단어를 수화로 익혔다.
일상에서 쓰는 독일어 단어를 몸으로 익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유치원에서 받은 자료에는 독일어 단어가 쓰여있고 그 위에 손동작의 사진이 있다. 자료를 보고 이해하기 어려운 건 스프레더자인(SpreadThesing)이라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영상을 계속 돌려보면서 따라 했다.
그 노력으로 딸과 처음으로 의사 소통하던 날. 나와 남편은 물개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둘째는 동생과 의사소통이 된다며 신기했으며 첫째는 눈시울이 붉었다. 수화가 동생의 언어라는 사실을 깨닫고 두 아들은 적극적으로 수화를 배웠다. 소통이 이루어지니 딸은 전보다 덜 징징거린다. 딸이 “아이스(Eis)”라고 외치면 나는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준다. 딸은 감사한다는 뜻의 수화를 보여주며 독일어 “당케(Danke)”를 말한다. ‘우리 나가자!‘를 수화로 표현하면 딸은 독일어인 “게헨(gehen)”가다를 말한다.
작지만 작은 변화가 우리 가정에 일어나고 있다. 딸의 속도에 맞춰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딸의 수다에 귀가 아픈 날이 오지 않을까?’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느린 시간의 기다림이 길어지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올 수도 있다. 좌절된 마음이 커져서 구렁텅이에 빠질지도 모른다. 때로는 우울감이란 파도에 밀려 하염없이 울 수도. 그럴 때면 목놓아 크게 울면 된다. 항상 그래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