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는 넣어둬
아침에 뉴욕의 공기와는 사뭇 다른 상쾌한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창문 밖에는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이 보였다.
산장 같은 숙소는 경치랄 것도 없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있었지만 그것조차 매력 있었다.
어제 저녁에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은 조미료 가득한 라면을 호로록 먹고 아침을 맞이하니 문득 건강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숙소에 딸려 있는 식당에서 그릭요거트와 풀내음이 가득한 그린샌드위치를 점심으로 포장하고 길을 나섰다.
우리는 트레킹을 할 게 아니라서 원하는 풍경을 보기 위해서 국립공원 내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러 갔다. 소풍 온 학생들과 나란히 셔틀버스를 타고 여기저기 사람들이 풍경이 아름다워 그 장소에 별명을 붙인 지점들을 차례차례 구경했다.
다행인 건 우리나라는 그런 장소들에 지역 캐릭터 동상이 조잡하게 서 있거나 영어 듣기 평가 시작을 알리는 클래식처럼 식상한 클래식을 틀어 놓거나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 실제로 가 본 별명이 붙은 지점들은 별명이 그 장소를 보는데 살짝 방해가 될 정도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보정이 잔뜩 된 비현실적인 사진들을 보면서 이 장소들을 상상했었는데 직접 본 요세미티는 조금 더 수수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요세미티의 풍경이 궁금해 짧은 트레킹 코스를 따라 산을 올랐다.
짧다고 했는데 아무리 올라가도 정상이 나오지 않았다. 점점 발 밑에 사람들은 작아지고 거대한 나무 꼭대기가 우리 발 밑에 있을 정도로 높이 올라왔는데도 오르는 길이 끝나지 않았다. 좁은 길 옆은 안전장치 하나 없는 낭떠러지라서 오르막길을 올라 가쁜 숨이 무서워서 더 가빠졌다.
어떤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부부가 우리 맞은편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한국말이 들려 반가웠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물어 볼 수 있어서 더 반가웠다.
"여기 정상이 얼마나 남았나요?"
"정상이요? 한 2시간? 가야 될걸요?"
오우.. 1시간을 올랐는데 앞으로 2시간을 이 낭떠러지 길로 가야 한다고?
그쯤 하면 됐다 싶어 남편과 길 한쪽에 철퍼덕 앉았다. 경치를 보면서 점심을 먹으려고 올라간 산이지만 너무 무서워서 경치를 등뒤에 두고 점심을 우걱우걱 먹었다.
고기 하나 없는 풀 샌드위치였지만 어찌나 맛있던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붙들고 아래로 내려오자 살았다 싶었다.
와.. 우리나라 산에 안전장치 설치해 주신 분들 너무 감사했다. 풍경이고 뭐고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등산을 해야 하다니.
넓은 갈대밭과 바다인지 호수인지 모를 호수를 지나 마음껏 걸었다. '곰 주의' 표지판이 이곳저곳 아무렇지 않게 널려 있었다. 캠핑장이 곳곳에 있었는데 '곰 주의' 표지판 옆에서 잠이 올까 싶었고, 이 세상에는 용감한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시시한 생각들을 하며 계속 걸었다.
어느 순간 뷰 포인트가 나와 있는 지도를 접었다. 한눈에 보이는 나무만 수십 가지 종류였고, 난생 처음 본 생물들과 마주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매 순간 환상적인 그림이었다. 나중에 숙소 갈 때만 지도를 보자 싶어서 가고 싶은 곳으로 마냥 걸었다.
자연을 실컷 보고 돌아온 숙소에서 아픈 다리를 부여잡았다.
이런 곳에서는 삼겹살로 시작해 라면으로 끝나는 멋들어진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숙소 식당에는 햄버거 따위를 팔고 있었다. 간절하게 된장찌개에 밥이 먹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최대한 덜 느끼한 생모짜렐라 햄버거를 먹었다. 남편과 한국 가면 뭐 먹고 싶은지 이야기하기 게임을 하며 겨우 허전함을 달랬다.
갑자기 마주친 동물들이 익숙해질 때쯤 요세미티를 떠날 시간이 왔다.
이 큰 국립공원의 아주 작은 일부에 있다 가지만 아쉬움보다 더 큰 마음은 '다시 기대'였다.
기대하던 곳에 왔고, 다시 또 올 날이 기대되는 시간들이었다.
언젠간 소중한 사람들과 다시 이곳에 와서 우연히 마주친 풍경에 감탄하는 날이 다시 기대됐다.
왔었던 곳에 빨간 줄을 지익 그어 지우지 않는 곳, 바로 요세미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