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만 2시간
뉴욕 JFK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 안은 까랑까랑한 인도말로 가득했다.
여기가 인도인지 뉴욕인지.
택시 운전기사님이 인도분(아마도?)이셨는데 가는 내내 스피커폰으로 즐거운 통화를 하셨다.
그분만 즐거웠다.
나와 남편은 곧 폐차될 것 같은 택시에 타고 있었다. 스피커폰으로 들리는 시끄러운 통화소리에, 좌회전 우회전을 할 때마다 몸이 한쪽으로 무자비하게 쏠리는 코너링을 견디면서 뉴욕에 온 신고식을 제대로 치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부식되고 더러운 차 안을 불안한 눈빛으로 살피며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앞으로 쏠리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 닿기도 싫은 손잡이를 움켜쥐어야 했다.
게다가 우리는 공항에서 연결에 실패한 e-sim 문제로 심난해하고 있었다.
내 핸드폰은 비교적 최신 버전으로 e-sim이 가능한 기종이어서 내 것만 e-sim을 사용하려고 했었다. 처음 사용해 본 터라 신중을 기해 연결했다. 메뉴 하나하나 누를 때마다 안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벌벌 떨며 연결했지만 안타깝게도 e-sim 연결은 결국 실패했다.
재차 설명서를 읽어 보며 시도했지만 설명서에 나온 메뉴와 내 핸드폰 메뉴가 달랐다. 대략 비슷해 보이는 메뉴를 눌러봤지만 등록이 되지 않았고, 공항 카페에 앉아 해결하려고 끙끙대다 2시간을 공항에서 날렸다. 한국은 자정을 넘긴 시간이어서 고객센터 연락은 되지 않았다. 남편 핸드폰은 현지에서 데이터를 구매하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미지의 세계 뉴욕에서 데이터 없이 숙소에 찾아간다는 것은 아프리카 한가운데 물 없이 떨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절망감이 밀어닥쳤다.
뉴욕이고 나발이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찾아들었지만 어찌어찌 마음을 다잡고 일단 공항 와이파이로 우버를 불렀다.
그렇게 부른 택시조차 이모양이니 우리 부부는 굳은 표정으로 서로 말이 없었다.
이조차 추억이 될 것임을 알지만 그건 나중의 '나'나 그러겠지 지금의 '나'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남편은 "괜찮아요. 나는 로마여행 갔을 때 데이터 없이 다녔어요. 나만 믿어요"라고 했지만 애써 짓는 웃음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을 분명히 봤다.
덜컹거리는 택시 안에서 애꿎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문득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걱정들로 숨이 턱턱 막히던 중에 갑자기 창문 밖에 고층 빌딩들로 둘러싸인 도시가 '쿠구궁'하고 등장했다.
뉴욕'씨뤼'로 발음해야 할 것 같은 씨뤼의 빌딩들이 비로소 우리가 미국에 왔음을 실감 나게 했다.
중학생 때인가 고등학생 때 영어 교과서 지문이 뉴욕 스카이 라인에 대한 내용이었다. 뉴욕의 빌딩숲이 교과서 한쪽에 멋들어지게 그려 있었다. 당시에는 그 지문이 왜 교과서에 실렸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빌딩이 만드는 라인이 뭐 그리 중요한가 싶었다. 직접 그 스카이라인이라는 걸 눈으로 보니 '아~ 교과서에 실릴 만하는구나'하는 감탄이 새어 나왔다. 감탄하고 있는 것도 잠시 이내 다시 걱정 속으로 빠져들었다. 빌딩들의 멋들어진 풍경도 나의 마음을 처음 미국에 왔다는 설렘으로 돌려놓지 못했다.
숙소 근처에 도착하자 탈출하듯 택시에서 내렸다. 낯선 거리 풍경에 살짝 불안했지만 커다란 캐리어를 질질 끌며 첫 번째 숙소로 향했다. 뉴욕은 숙소비가 너무 비싸서 남편이 고심고심한 끝에 가성비 있는 그나마 꽤 괜찮은 숙소를 예약했다. 로비에서 체크인을 하는데 직원분 영어가 너무 빠르고 우리의 정신도 이미 반쯤 나가 있어서 대충 yes, yes로 알아들은 척을 하며 예약한 방으로 올라갔다.
숙소에 들어가서도 와이파이를 재빨리 잡아 e-sim 문제를 해결하기 바빴다. 장시간 비행과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때문에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남편은 괜찮다며 위로했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쉬고 난 뒤 늦은 점심을 먹고 핸드폰 가게를 돌아다니며 방법을 찾기 위해 시내로 나섰다. 뉴욕에서 피자로 유명한 맛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도 마음 한편에는 불편함이 남아 있었다.
e-sim 문제는 결국 그날 시내에서도 해결하지 못했다. 핸드폰 가게 앞에서 몰래 와이파이를 연결하며 다소 애처롭게 길을 찾아다녔다. 다음날 여행 일정 사이사이에 핸드폰 가게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e-sim을 구입하여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손해는 우리의 마음이었다. 특히 나의 마음. 남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내가 구매하고 내가 연결했던 e-sim이었던지라 내 실수에 자책하는 마음까지 더해져 여행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평소에도 걱정이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여행 내내 데이터 사용을 하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쓸데없는 과다걱정으로 여행의 초반을 불필요한 감정에 써버렸다. 결국 이 일은 남편과 뉴욕여행을 떠올리며 낄낄거리는 주제 중 하나였다. 그럴 줄 알았다. "아이참, 그때 정말 등에서 식은땀 났다니까~"라며 재미있는 에피소드쯤으로 넘기게 될 일이었다.
마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스멀스멀 밀려오는 걱정을 애써 떨치려는 노력은 삼십몇 년간 살아오면서 잘 되지 않았다. 걱정이 되는데 어떻게 하라고. 감정이라는 게 영화 인사이드아웃에서 버튼을 누르면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맺고 끊음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걱정을 삼십몇 년 동안 막아봤지만 조금도 막을 수 없었다.
꾸준히 실패해 온 걱정 안 하기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그나마 찾은 방법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다. 나는 지금 사랑하는 남편과 손을 잡고 뉴욕 거리를 걷고 있다. 1년 전부터 준비해 온 미국여행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상상을 너무 자주 해서 꿈도 종종 꾸었던 일이 현실로 실현되고 있다. 이런 순간에 집중하기로 한다.
집중은 볼록렌즈 돋보기처럼 내가 보고자 하는 것 말고 그 옆에 다른 대상은 잘 안 보이게 한다. 침잠하는 기분은 보지 않고 다른 감정에 집중하다 보니 걱정이라는 감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흐릿하게 보이는 염려들을 굳이 또렷하게 보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할만하다.
잘 안되면 스스로에게 윽박질러본다. 타이르기도 하고. 지금 이 문제에 대해 그리도 심각할 일인가? 대부분은 아니지 않은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도착한 뉴욕.
어둑해진 뉴욕 거리를 걸으며 남편과 손을 꼭 잡았다.
거대한 빌딩들 사이로 설레는 바람이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그 순간과 감정에 집중하면 되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