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요원이 된다는 건,
누군가의 지시만 따르며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작전이 떨어지면, 그 모든 구조를 스스로 설계해야 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위장과 회피, 접선과 은닉,
그리고 자금의 흐름까지—
하나라도 어설프면 작전은 노출된다.
지원은 있다.
그러나 제한적이다.
무제한은 아니고,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다.
‘그 돈의 흔적을 남기지 말 것.’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합법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동시에 국가의 감시망에도 걸리지 않는 자금 집행.
그건 단순한 비자금 운용이 아니다.
정보와 상식, 그리고 습관에 대한 싸움이다.
그중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바로 ‘안가’ 확보다.
한 공간을 몇 년씩 은밀하게 유지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임대차 계약, 관리비 납부, 수도·전기·인터넷 개통—
그 어느 것 하나도 ‘흔적 없는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린 보통,
짧은 계약을 선호한다.
되도록 현금 거래,
되도록 계약서 위조가 쉬운 구조.
그리고,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동네.'
VIP를 모시는 공간이라면 더 까다롭다.
고시원은 위장에는 좋지만, 오래 머물긴 어렵다.
시설도, 보안도, 설득력도 떨어진다.
그래서 택한 건 신촌 인근의 원룸.
대학가라 단기 계약도 흔하고,
현금 선호도 높고,
사람들의 시선도 바쁘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오늘 아침, 최종 계약을 마쳤다.
계약자는 ‘김세진’,
내가 만든 다섯 번째 신분증의 이름이다.
계약서는 임대인 사인을 조율한 복사본으로 대체됐고,
입주는 오늘 저녁으로 맞췄다.
집기류는 최소로,
위급 상황엔 3분 내 철수 가능하도록 동선을 짰다.
무기는 없다.
이 나라에선 총 한 자루가
보통 사람과 요원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나는 그 기준을 믿지 않는다.
총보다 빠른 건 망설임 없는 결정이고,
총보다 무서운 건 노출된 위치다.
중국 쪽 요원들은 물러설 줄을 모른다.
암살조가 존재하며,
그들이 움직일 땐 목적만 있다.
VIP를 사망케 한 후,
사고사로 조용히 처리된 경우도 이미 여럿이다.
이번 작전,
그들은 백준기를 단순한 변수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가 뭘 알고 있든, 모르든,
‘무엇이든 알고 있을 가능성’만으로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를 데려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반드시 설득해야 한다.
문제는,
그가 나를 믿게 만들 수 있느냐다.
우리는 늘 이런 방식으로 누군가를 만나왔다.
위험을 알려주고,
보호를 제안하며,
그 안에서 정보를 받아내는 일.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백준기라는 남자에게선
어디서도 배운 적 없는 반응이 느껴졌다.
도망치는 방식,
몸을 숨기는 판단,
불확실한 정보를 정리해 가는 방식.
그건, 너무 서툴렀지만 동시에—
너무 본능적이었다.
나는 지금,
그 본능을 믿고 움직이려 한다.
휴대폰을 들었다.
어제 줬던, 등록되지 않은 번호.
신호는 다시 살아났다.
나는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말해야 할 것들이 많고,
지켜야 할 것들이 생겼다.
17. 어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