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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기용품 가득한 그 집에 아이 없이 돌아왔다.

별이 되어 선물해 준 엄마라는 이름

by 최고담 Feb 15. 2025


총총이는 신생아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나도 몸 회복이 되지 않아 보러 갈 수 없었다. 미리 예약했던 조리원은 취소해야 했다.


조리원에서 다른 산모들은 다 아기를 보고 젖을 물릴 텐데, 그 속에서 내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즈음 내 머릿속은 지옥을 걷고 있었다.


왜 아플까. 내 탓인가? 임신을 알아채기 전에 넘어진 적이 있는데 그때 그런 게 아닐까? 아니면 임신 중에 체해서 링거를 맞은 게 애한테 문제가 되었나?


아이가 아픈 것을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어. 결국 내 탓을 하게 되는 무한루트를 밤마다 걷고 또 걸었다.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경사였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초상집처럼 우중충해졌다.


친정아버지는 자신이 반대해서 애가 아픈가 자책을 하셨고, 시댁에선 택일을 잡을걸 그랬다며 속상해하셨다.


나는 애써 별일 아닌 듯 시술만 하면 괜찮을 거라고 양가에 소식을 전해야 했다. 누구의 죄도 아닌 것을 모두가 짊어지게 할 순 없었다.


나는 모두에게 괜찮을 거라 말했지만, 사실 확신 할 수 없었다. 그저 말이 씨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괜찮을 거다 괜찮을 거다 그랬다.


산후조리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애가 아팠으니까 보러 가야 했으니까. 젖이 돌기 시작하며 초유를 악착같이 유축했다. 초유를 잘 먹여야 아이가 건강하다고 그랬다.


모유수유를 하고 싶어 공부도 참 많이 했는데, 그래서 적극적으로 모유수유를 권장하는 조리원으로 고르고 골랐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제는 분유를 먹여도 좋으니 내 품에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수술 4일 차에 가을이 바람이 제법 매서웠지만 온몸을 적당히 둘러싸고, 신생아 중환자실에 첫 면회를 갈 수 있었다.


신생아 중환자실 앞에는 면회시간즈음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총총이가 아프기 전까진 몰랐다. 아픈 애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그때는 코로나시대가 오기 한참 전이라 손소독제가 흔하지 않을 시절이었다.


젤로 된 걸 문질러서 소독이 된다는 게 생소했지만,  손 소독을 말끔히 하고 총총이를 보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보기에도 참 많이 아파 보이는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모두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오로지 내 아이만 보러 경주마처럼 들어가서 찾아야 했다.


총총이의 태어나자마자 몸무게는 2.72kg


그 작은 아이에 몸에 약물 줄이 너무 많이 달려있었다. 하지만 울 수는 없었다. 면회시간은 짧고 어떻게든 눈에 담아야 했다.


입술은 나를 닮았고, 코는 남편을 닮았다. 귀는 부처님 귀같이 귓불이 통통한 느낌의 아이는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께 원래 이렇게 자는 거냐 물었더니, 깨면 힘들어해서 약으로 재운다고 했다. 만지면 사라질까 싶어 눈으로만 쳐다보다 문득 눈썹이 나와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 기분이 묘해서 눈썹만 슬쩍 매만져 줬다.


어쩐지 너무 인형 같아 살아있는 게 맞나 싶은 기분이었다. 간호사 선생님께 초유를 유축해 놨노라고 말하자 다음번엔 가지고 와달라고 하셨다.


내가 뭐라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어서 기뻤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며 우리는 매일 총총이 면회를 다녔다.


남편은 회사에 말해 아이가 아파서 출산휴가에 휴가를 붙여서 쓰겠다고 이야기했는데, 다행히도 흔쾌히 휴가를 쓰게 해 주셨다. 우리 부부는 아기용품 가득한 그 집에 아이 없이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다가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왕이면 어머님이 계속 속상해하셨으니 어머님 다니는 절에 아이 이름 작명을 부탁드리면 어떨까 싶어 전화를 드렸다.


어머님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퇴원하면 받지 그러냐고 하셨다.


나는 밝은 목소리로 “어머님 늦게 신고하면 벌금 물어요! 그리고 오빠 쉴 때 신고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대신 좋은 이름으로 좀 부탁드려요. “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돌림자가 있었음에도 그런 거 상관없이 좋은 이름이라고 어머님이 받아온 이름이 재신이었다.


심을 ‘재’ 몸 ’ 신‘ 잘 버티고 이겨내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이름이라 하셨다. 사실 나는 무슨 이름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이 세상에 총총이가 있어야 할 이유가 있길 바랐다.


지금 있는 태명은 어쩐지 홀연히 날아가버릴 거 같아서 무서웠으니까. 그냥 그렇게 이 세상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하길 바랐다.


남편 이름 밑에 내 이름 내 이름 밑에 재신이의 이름이 적힌 등본이 나왔을 때, 이제 남은 건 재신이가 퇴원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남편차를 타고 하루의 2번 우리 부부는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아이를 만나러 갔다.


병원에서 시술 날짜를 잡아야 하는데 언제가 좋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재신이의 경우 심장 판막만 붙어있으니 칼을 대고 가슴을 여는 것보다, 허벅지 대동맥을 타고 올라가 판막을 떼어내고 풍선을 이용해서 자리를 넓혀주는 시술로 가는 방향을 이야기했다.


가슴을 여는 수술보다 시술이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덜하니, 그게 좋을 거 같다고 이야기했다.  


주치의 선생님이 출장을 가셔서 며칠 안 계셨던 터라 아이 컨디션에 따라 정하자라고 이야기 들었을 뿐 별 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재신이가 태어난 지 10일째.


내 생일이었다. 수술 날짜를 잡을 때엔 분명 셋 일 줄 알았는데, 그날도 우리는 둘이었다.


생일이 즐거울 리 없는 순간이었지만, 집에 산후 미역국이 넘쳐나서 미역국을 끓이지 않아도 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우리는 면회를 갔다.  


면회를 다니면서 재신이가 눈을 뜬걸 본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날 내 생일이라는 걸 아는 애 마냥 눈을 몇 번 떠줬다. 그게 또 뭉클했다.


이름도 불러주고 엄마 오늘 생일이라고 말도 해주고 그랬는데, 아이가 좀 살이 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우리 아기가 나아지고 있구나. 그렇게 믿었다.


이제 주치의 선생님이 돌아오고 날만 잡으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다음 날 병원에서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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