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쩨리 Apr 21. 2019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미성년>

책임지지 못하는 성년, 미(未)성년들

배우 김윤석이 메가폰을 잡았다.

그동안 뛰어난 연기로 이미 배우로서 우뚝 서 있는 사람이 감독을 맡았다고 하니,

조금 궁금해졌다. 그런데 마침 또 소재가 볼륜이라고 해서,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보고 왔다. <미성년>


들어가기 전에

이 영화는 제목이 <미성년>인 것처럼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하는,

그래서 성년이라고 할 수 없는 미(未) 성년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이 저지른 일이란,

이 영화의 소재인 볼륜부터, 자신의 아이까지 모두 포함한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생기는 상처들과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그 상처들을 다루고 있다.

'볼륜'을 다룸에 있어서 그 소재가 가지는 자극이 아닌 그 피해자들의 감정선을 잘 다룬 영화다. 


성년으로서 져야하는 책임을 피하는 성년, 

그래서 미(未)성년들

출처 : 네이버 영화

이 영화에 나오는 성년들은 성년으로서 책임을 지지 못하는 '어른'들 투성이다. 

윤아의 생물학적 아빠는 윤아를 키우는 책임을 오로지 윤아의 엄마(미희)에게만 전가하고

돈 하나 제대로 벌지 못하면서 도박이나 일삼는 인간이다.

그래놓고 윤아의 이름도, 나이도 제대로 모르면서 신용카드 하나 만들고 가란 얘기나 지껄인다.


두 가정을 파탄 낸 장본인인 대원은 자신이 저지른 볼륜, 자신의 아들인 못난이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여기 저기 도망다닌다. 정작 볼륜에 대해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할 인간 말종 쓰레기 대원은

이 영화에서 가장 책임지지 않는, 책임을 회피하는, 그래서 가장 어른답지 못한 미(未) 성년이다.


책임을 회피하는 그들에게 고함,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무책임의 결정치, 대원

이런 미(未)성년들의 특징은 그들이 저지른 일들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대한다는 것이다. 볼륜의 가장 큰 책임자인 대원은 영주에게 자신이 볼륜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며 여행이나 다녀오자고 지껄인다. 어쩜 그렇게 볼륜을 저지른 인간의 전형적인 변명을 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책임을 회피하는 대원은 영주가 집안의 커튼을 걷으며 환한 햇빛을 마주할 때

그 햇빛을 마주하지 못하는, 햇빛을 마주할 자격이 없는 인간이다. 

대원이 대놓고 책임을 회피하는 인간이라면 미희는 미묘하다. 볼륜의 결과로 생긴 아이를 낳고자 하지만,

들키고 난 후에는 아기를 들여다 보지도 않고 애써 아기 얘기를 피한다. 열아홉 살에 낳은 윤아를 지금까지 책임지고 키워왔지만, 썩 좋은 관계는 아니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 것 같은데 오히려 큰소리로 깔깔 웃기도 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아이처럼 보이는 인물이기도 한다.


마치 윤아가 마지막에 그의 감정을 터뜨린 것처럼 미희도 비슷하다.

대원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좌절감, 그동안 흔히 이야기 하는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아이를 키워온 것에 대한 서러움 등등 애써 외면해온 책임과 감정들을 마주한 순간

영화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 서럽게 운다.


혼자 열아홉살부터 아이를 키워온 그의 삶이 가진 고단함, 아이를 잃은 어미의 심정,

자신은 '사랑'이었지만 상대방은 '성욕'에 지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한 비참함 등을 생각해보면

관객은 미희를 비판하는 데에 약간의 망설임이 생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네 사람을 기만한 거야"라고 했던 영주의 말처럼 그도 대원에게 기만당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미희는 대원이 가정이 있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볼륜을 저질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그의 삶이 어때왔든, 대원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었든 도덕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사실이다.

그도 상처받아온 삶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에게 상처를 줘도 되는 것이 아니며,

상처를 준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의무가 있다.


이런 인간들에게 일침이라도 날리듯, 윤아는 영화 초반 이렇게 말한다.


이게 없던 일이 되니?


그렇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런다고 없던 일이 될까?

그들이 뭐라고 하든, 그건 없던 일이 될 수 없다.

그 일로 인해 여러 사람에게 생긴 상처와 흔적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싸움 후 얼굴에 남은 상처처림 그건 없던 일이 될 수 없다.

'없던 일 될 수 없다'고 얘기하는 장치들은 여기저기 널려있다. 주리와 윤아가 뽀뽀를 하면서주리 입술에는 얇은 상처가 생기고 주리는 그 상처가 신경쓰인다.

미희와 대원의 볼륜으로 잉태된 아기는 비록 조산이었지만 태어났다.

학교에서 주리와 윤아가 싸우면서 그들의 얼굴에는 상처가 생긴다. 

아기는 비록 사라졌지만 '엄마'의 몸이 된 미희는 모유가 계속 흘러나와 옷을 적신다. 

그렇다. 볼륜을 저지른 이가 그 어떤 말로 변명을 해도 그건 절대로 없던 일이 될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의 마음을 할퀴고, 상처를 내고, 흉터를 남긴다. 


볼륜 피해자들의 이야기 하나, 영주

영주는 윤아에게 일방적으로 대원의 볼륜 사실을 전해듣는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처음에 영주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묵묵히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약할을 수행한다. 대원이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먹고 가"라고 하고,

아침을 먹지 못하고 아빠를 쫒아가는 주리에게 맨발로 달려나와 도시락을 챙겨준다.

처음에는 마치 대원의 볼륜 사실을 '없던 일'처럼 하려는 것처럼 애써 외면한다.

그렇지만 영주의 마음은 복잡하다. 대원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겨우 열일곱에 지나지 않는 딸이 자신보다 먼저 '아빠'의 볼륜 사실을 알았다는 것에 대한 안쓰러움, 미안함과, 어떨결에 밀친 미희의 아이가 조산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죄책감,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집의 재산이 모두 대원의 명의로 된 것에  대한 좌절과 후회 등 여러 감정들이 소용돌이 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엄마로서의 역할을 해내며 머리를 하러 가는 와중에도 주리에게 "떡볶이 사줄까?"하고 물어보는 장면을 보면 마음에서 뭔가 울컥, 올라온다. 정작 고해성사를 하며 용서를 빌고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은 어디 멀리 나가서 '마음정리' 따위나 하는데 그는 자신이 가졌던 마음과, 미희가 조산을 하게 했던 사실과, 그들을 용서를 할 수 없음에 대해 고해성사를 한다.

책임을 져야할 인간은 대원인데, 오히려 영주가 그 책임들을 다 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주라는 인물은 더더욱 대원과 대비되고 우리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한다.

왜 책임을 져야할 인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책임을 지고 있을까?



볼륜 피해자들의 이야기 둘, 아이들

아이들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부모가 볼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해 극복해 나간다.

주리는 그 사실을 애써 없던 것처럼 하려고 하지만 윤아의 폭로로 인해 실패하고

정말 '있는 일'로 만들어 버린 윤아와 싸운다. 그리고 묵묵히 '학생'으로서의 역할을 꿋꿋이 수행한다. 

그런 주리에게 조산으로 태어난 아기가 대원의 볼륜을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일로 만들어 버리자

윤아와 함께 묘한 책임감을 느낀다. 

윤아는 여기저기(엄마와 주리) 화를 내고 틱틱 거리는 방식으로 애써 그 상처를 외면한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난 이상 더이상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오히려 아기에게 관심을 쏟고 자신의 아빠가 가졌으면 참 좋았을, 자기 동생에 대한 양육자로서의 책임감을 느끼며 출생신고서를 작성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윤아는 스스를 치유하고 상처를 극복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기에게 생긴 일을 외면하고 외면하다가 주리에게 눈 앞에 들이댔을 때 눈물을 터뜨린다.

그 순간이 윤아로서는 엄마가 저지른 볼륜으로 인한 상처를 제대로 마주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다 컸다,다 컸네


아직은 어른들의 보살핌이 필요한 (연령이나 법적으로) '미성년' 들을 성년처럼 대하며 보살펴줘야할 어른들이 그들에게 하는 말이다. 대원은 자신에게 잔소리를 하는 주리에게 "이제 다 컸다"고 하고 윤아의 '아빠'는 한번도 책임진 적이 없으면서 "야 너 이제 다 컸다"라고한다. 


그러나 그런 대원의 말에 영주가 "그래도 아직 아기야" 라고 한 것처럼 이들은 어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져야할 의무도 없으며 어른들이 저지른 일로 받은 상처에 대한 보살핌이 필요하다. 그저 "다 컸다"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간통죄는 폐지되었지만 볼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볼륜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책임들과 상처와 흉터들은 볼륜이 저지른 당사자들이 지고 가면서 보듬어야할 문제들인데 이 영화에서든, 현실에서든결국 그 피해자들이 책임을 지고 스스로 보듬는다. 세상에 수많은 바람을 피는 사람들과 볼륜을 저지른 이들은 이 영화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이라는 걸 하긴 할까? 

이 영화를 보고 울고, 힘들고, 아픈 사람들은 결국 또 볼륜의 피해자들이 아닐까. 

이 영화를 보면서 볼륜을 저지른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그들이 져야할 책임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딱, 한 걸음만 더 가까이 <파이브 피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