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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쩨리 Aug 01. 2017

정체성의 상실,<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확실히 흥행하진 못한 영화다. 아마도 그것은 포스터의 잘못이거나, 광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늑대소년>을 찍었던 감독이라 비슷한 영상미를 느낄 수 있는데 시나리오 나름 괜찮다고 느꼈다. 왜 이 영화를 '한국형 히어로물'이라고 명명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단순 히어로 물이 아니라 정체성을 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서서히 확립해가는 여정의 영화로 보았다.


1. 기억상실 - 정체성 상실

▵'홍길동' 주민번호가 없어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할 수 있다.

 영화 속 홍길동은 기억을 잃고 자신의 복수를 위해 '김병덕'이라는 인물을 찾는다. 그리고 이것이 겉으로 보이는 이 영화의 스토리이다. 그러나 홍길동이 김병덕을 찾아가는 과정을 자세히 보다보면 이것은 단순히 나쁜놈 처단하는 홍길동 히어로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아(identity)의 상실이 기억 상실로 나타나는 경우는 히치콕의 <망각의 여로(Spellboud)>부터 시작해 많은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 속 홍길동은 어린 시절 기억을 잃어버린 인물로 자기 자신도 정확히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 그가 가진 것은 '복수', 그리고 '분노'라는 아주 강력하고 폭력적인 감정이다. 심지어 그의 이름은 우리가 어떤 예시문서에서 아주 흔하게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는 '홍길동'이다.  덕분에 주민번호조차 없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홍길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정체성을 잃은 그에게 가장 따라가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것은 바로 '복수심'이다. 그래서 그의 여정의 시작이 이 복수심을 따라가 박병덕이라는 인물을  찾는 것이다.   


  영상미에서 조성희 감독 특유의 느낌이 있다. 홍길동이 박병덕을 찾기 위해 방문하는 '명월리'라는 공간은 마치 동화 속 마을 혹은 머릿 속에만 존재하는 그런 마을 같은 곳이다. 정비소나 건물 등이 실제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마치 누군가의 상상 혹은 꿈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어릴 때 '집 그려봐' 하면 그리던 전형적인 집의 형태인 김병덕의 집


2. 아이들 - 잃어버린 기억 그리고 정체성

   메이킹 필름을 보면 홍길동이 아이들을 싫어하는 역할이라 못되게 굴어야 하는데 아이들이 정말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차마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제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 안에서 홍길동은 정말로 말순이와 동이를 싫어한다. 말순이가 가끔 가다 '아저씨 ,친구없죠?'와 같은 어그로를 시전할 때마다 뭔가 '그럴 수도 있겠다.'싶지만 그 특유의 사랑스러움과 귀여움, 발랄함을 아이들을 보면 누구나 좋아할만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길동은 아이들을 싫어한다. 말순이가 먼저 '친구가 되줄 게요' 라며 손을 잡자 화들짝 놀라 그는 손을 탁 하고 빼버릴 만큼, 말순이가 손을 덥썩 잡자 손을 빼고 그 손을 탈탈 털만큼 싫어한다. 

"아저씨, 이제 우리 친구해요."

이러한 홍길동의 행동은 그가 잃어버린 기억, 즉 정체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의 발로이다. 홍길동은 기억을 찾기 전까지 항상 악몽에 시달린다. 그의 과거는 그에게 악몽이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기억을 찾고싶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매우 두렵다. 홍길동이 박병덕을 찾는 내내 홍길동을 쫓아다니는 아이들은 바로 그가 잃어버린 과거이자 정체성이다. 월광리는 앞서 말했듯이 홍길동의 마음이자 정신세계이다. 월광리에 사는 사람들은 홍길동의 정신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다. 홍길동의 정신세계는 사실 홍길동이 두려워하는 과거 기억이 필요하며 그것을 욕망한다. 때문에 홍길동이 잃어버린 그 기억, 다시 말해 영화 속 말순이와 동이는 그들이 보호하고 지켜줘야할 존재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보면 말순이와 동이는 마을 어디를 가도 환영받는 존재이다.


모텔 주인이 주는 캬라멜 부터 부동산 아저씨가 주는 음료수, 중국집 아저씨가 주는 탕수육 서비스까지, 아이들은 어딜 가도 사랑받는다.

  또한 영화 속에서 아이들은 홍길동이 그렇게 싫어하는 티를 내는대도 불구하고 믿고, 따르며 항상 쫓아다니다가 심지어 조력자가 되기도 한다. 이는 홍길동의 과거 기억들, 다시 말해 홍길동이 잃어버렸던 그 자아는 홍길동에게 반드시 회귀해야만 하고 홍길동에게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3. 강성일 - 복수심

 영화에서 강성일은 유일한 악역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홍길동이 자신이 자아를 찾는데에 자극이 될 만한 말을 던진다.

넌 니가 누군지 모르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뭔가 익숙하지 않은가? 우리는 흔히 말하는 '멘붕'에 빠지면 '난 누구, 여긴 어디'라는 말을 던진다. 사실 이 말을 농담처럼 해서 그렇지 진지하게 따지자면 이것은 우리가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런 질문을 강성일이 홍길동에게 던진 것이다. 강성일은 홍길동의 복수심을 자극하는 존재이자 복수심 자체이고 홍길동의 정신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다양한 것들을 모두 파괴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와 그의 무리들은 다른 색 하나 없이 오로지 검은 색으로 점철되어 있고 월광리 사람들, 아까 언급한 것처럼 홍길동의 정신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을 모두 없애려는 자들이다. 이 복수심이라는 감정은 대단히 파괴적이고 강력해서 자아를 잃어버린 홍길동을 처음 움직이게 만들지만 결국 홍길동의 정신세계를 파괴해버리고 홍길동을 집어삼킬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이 복수심은 홍길동의 존재를 먹고 싶다. 때문에 홍길동은 자아를 찾아서도 안되고, 홍길동의 정신 세계의 다른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해선 안된다. 때문에 극 중 강성일과 그 무리들이 아이들을 싫어하고 월광리 사람들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강성일이 홍길동에게 속삭이는 대사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인간 죽이고 나한테 와. 우리가 네 곁에 있어줄게.

 이러한 대사는 강성일이 어떤 강력한 우위에 있는 악당이 아니라 사실은 홍길동을 갈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치 강성일이 엄청난 파워를 가진 것처럼 그려지는 이유는 실제로 복수심이라는 감정이 매우 강력하고 자극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4. 응시(gaze)에 대하여

  강성일과 홍길동의 파워의 차이는 바로 이 응시(gaze)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일상 속에서 조그만 생각해보자. 감시를 당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진 걸까, 아니면 감시를 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는 걸까. 응시(gaze)에서 주체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힘을 가진다는 뜻이다. 응시의 대상이 된다는 건 응시를 하는 주체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응시를 하는 주체가 누군지도 모르고 때로는 응시의 대상이라는 것도 인지할 수 없기에 힘이 없는 존재이다. 이 영화에서 홍길동이 아주 강력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바로 이 응시에서 드러난다.


홍길동이 활약하는 순간에는 이 두 눈에만 조명의 초점이 맞춰진다.

  영화에서 홍길동이 악당을 처치하는 첫 부분, 그리고 마지막에 마침내 강성일 악당을 처리하는 부분에서는 홍길동의 눈만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조명으로 강조된다. 보통의 히어로물이 영웅의 압도적인 전체 모습을 담아내는 반면에 여기서는 오로지 홍길동의 시선(gaze)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만큼 누가 응시(gaze)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고 또 응시의 힘이 대단한 것이다. 이러한 홍길동과 달리 영화 속 강성일은 시선은 뿌연 안경에 의해 항상 가려진다. 


강성일의 응시(gaze)

  그가 자신의 응시(gaze)를 직접하는 순간은 오로지 홍길동을 이길 뻔한 순간이다. 그 장면만 안경을 벗고 강성일의 눈에 조명의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나 그 외의 장면은 항상 강성일의 시선은 뿌옇다. 비록 복수심이 강력하고 자극적이어서 힘이 있어보일지언정 결국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홍길동 캐릭터 자체인 것아다.

 개인적으로 정말로 인상깊게 봤던 영화이기에 흥행을 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쉽다. 영상미도 영상미지만 영화의 주제도 다시 곱씹어볼만큼 좋다.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다시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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