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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쩨리 Oct 11. 2019

좋아하는 것들에 대하여 #1. 미니 연필깎이

냄새부터 소리까지

※동영상과 같이 읽으면 금상첨화

© 다락방 - 꼭 영상이랑 같이 글을 읽어주세요.

 어릴 때는 연필을 싫어하고 샤프를 좋아했는데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니까 연필이 좋아졌다. 원래 남의 돈 받아 일하기 시작하면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 더 좋아지는가 부다. 어릴 때 필통에 연필을 집어넣다 손바닥이 찔린 경우를 제외하면, 연필에 나쁜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바른 손글씨를 쓰려면 연필로 먼저 예쁜 글씨를 만들고 그 뒤에 샤프로 넘어가야 좋다고 해서 엄마는 저학년 때까지 꼬박꼬박 연필을 쓰게 했다.


 마냥 연필을 싫어할 수 없었던 건 엄마가 매번 연필을 깎아주었기 때문인데, 심지어는 연필깎이도 아니고 칼로 전부 깎아주셨다. 지금이야 나도 기술이 조금 생겨서 매끈하고 예쁘게 연필을 깎을 수 있지마는 그때의 나는 암만해도 엄마의 솜씨를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엄마가 깎아준 연필은 가지런히 필통에 누워서 제 역할을 하기까지 정갈한 모습으로 누워있곤 했다.


© 다락방

  연필이 뭉툭해져서 엄마에게 깎아달라고 할 때마다 그 땐 그게 얼마나 수고스럽고 사랑이 필요한 일인지 몰랐는데, 직접 연필을 깎다보면 여간 귀찮고 번잡스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쁘게 깎는 건 둘째치고 이리저리 튀는 연필 찌꺼기와 잘게 갈린 흑연이 코를 간질인다. 4B 연필처럼 진한 심의 연필을 깎는 날은 얼굴에 검댕을 묻히기도 쉽다. 한 5~6개 깎다보면 손에 커터칼 뒷면 그대로 자국이 남아 있기도 하는데 스삭스삭 깎다보면 가끔 아득해지기도 한다.


 결국 엄마도 점점 지쳤는지 그 역할을 연필깎이에게 넘겨주었는데 동생이 힘주어 깎다가 손잡이가 날라가서 굉장히 힘겹게 깎았던 기억이 난다. 짧은 부분만 남은 연필깎이는 차라리 손으로 깎는 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로 처음에 힘들었는데 덕분에 지렛대의 원리를 발견한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깨달았다.


© 다락방

 연필이 좋아지기 전 연필깎이는 그저 도구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다. 알라딘에서 책을 구입하고 - 원래 굿즈 살려고 알라딘에서 책을 사는 거다- 받은 미니 연필깎이로 난 연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연필은 육각형이 주는 안정적인 그립감(촉감), 종이마다 각기 다르게 내는 사각사각 소리(청각), 갓 깎은 연필에서 나는 은은한 나무 냄새와 미묘한 흑연 냄새(후각), 그리고 좋아하는 디자인으로 쌓인 기둥(시각)까지. 모든 감각을 기분 좋게하는 존재다.


 그리고 이런 느낌을 극대화해주는 것이 바로 연필깎이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알라딘 연필깎이는 사이즈가 작아 3개~4개 정도를 깎으면 연필통을 비워줘야 한다. 어릴 때는 연필깎이 통을 비우는 것이 매우 귀찮았는데 지금은 그 과정조차 즐겁다.


우선 연필깎이를 빙글빙글 돌린다. 그럼 툭, 하고 윗통이 빠지고 내가 비워줘야할 아랫쪽 통과 분리된다. 그럼 순간적으로 연필의 나무 냄새와 흑연 냄새가 훅하고 올라오는데 마치 새 책의 냄새처럼 은은하고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툭툭, 통을 쳐서 비우는데 그 때 쏟아지는 연필의 흔적들을 보면 뭔가 기분이 묘하다. 쓰레기통에 버려질 찌꺼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기분 좋은 무늬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연필로 인해 연필깎이가 좋고, 연필깎이로 인해 연필이 더 좋아졌다. 내가 나무라면 연필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빌만큼(고통스럽지만 않다면) 연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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