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그렇지만 하루를 다르게 만드는 그것
그런 날이 있다. 별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모든 게 거슬리는 날. 그냥 버스는 그전과 같은 속도로 달리는데 유독 느린 것 같이 느껴지고, 오늘따라 횡단보도의 신호는 길며, 사람들이 유독 나만 건드는 것 같은 날.
그런데 또 그런 날이 있다. 아주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날 마주쳤던 어떤 작은 친절이 미간 가득 메우던 짜증을 날려버리는 날. 그건 내가 아주 훌륭한 음악을 들어서도, 너무 맛있는 걸 먹어서도, 기분 좋은 소식을 들어서도 아니다. 똑같이 버스가 느리게 갔던 것 같고, 횡단보도의 신호가 길었던 것 같고, 사람들이 유독 나만 건드는 것 같았는데, 그 순간 아주 자그마한 친절을 만난 것뿐이다.
우리가 마주친 여러 친절 속에서 어떤 친절을 너무 거대해서 부담스럽지만, 어떤 친절은 아주 작음에도 큰 효과를 내는 것들이 있다. 보통 그런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은 '센스 있다'라고 한다. 그 작은 친절로 바뀌는 하루를 만끽해보면 사실 '센스 있다' 정도로 얘기하기는 아깝다.
'작다'라는 표현은 사실 베푸는 사람의 수고로움을 베풂을 받는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런 친절은 누군가에는 그저 직업이어서, 정말로 그냥 말 한마디라서, 혹은 아주 작게만 움직이면 되어서 그저 베푼다. 그 친절에는 어떤 기대도 담겨 있지 않다. 사실 받는 사람의 기대도 없는 것이 그런 친절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친절이, 예상치 못했던 상대에게 '스르륵'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절은 가끔 누군가의 하루를 바꾼다. 적어도 3시간 동안의 기분은 바꿔준다. 갑자기 그동안 짜증 냈던 것들이 다 뭔가 싶고, '내가 너무 예민했나' 반성도 하며,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지하철에서 별로 무겁지도 않은 가방을 들고 가고 있을 때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건넨 말
회사에서 경보가 잘못 울려서 경비 업체 전화가 왔을 때 당시 담당자
그냥 농담으로 했던 '열심히 하고 있다'는 얘기에 진심으로 말해준 직장 동료분
카페에 노트북이 든 큰 가방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자 친절히 알려준 남자분
일기에 한문단도 차지하지 않는 그 작은 친절들은 사실 좀 작긴 해서 어딘가 적어두지 않으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친절을 만나는 많은 날들 중 다수는 유독 힘들었던 날이라, 막상 마주치면 그 따뜻함에 눈물이 나기도 한다. (물론 울면 챙피하니까 속으로)
'작은'친절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냥 그날이 유독 힘들었던 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자리를 양보한 것도 아닌데 그냥 자기 앞에 서 있는 내 가방이 무거워 보이셨는지 가방을 자기한테 맡기라던 아주머니를 만난 그날은, 약 2시간에 걸쳐 대외활동 면접을 보러 갔다가 왠지 불합격했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가던 길, 돌아오는 길 긴 시간을 지하철 1호선에서 서서 오느라 지쳤던 날이었다.
회사에 경보가 잘못 울려서 경비 업체에 전화가 와 "괜찮으세요?"라는 말을 들었던 날은 야근 때문에 12시가 좀 넘어서 팀장님과 단 둘이 사무실 전체를 정리하고 불을 끄면서 그날의 기분인지 아니면 내 미래인지 모를 칠흑 같던 어둠을 헤쳐 나가던 길이었다.
그냥 농담으로 건넨 '열심히 하고 있다'에 진심으로 직장 동료 분이 "다 알고 있어여 ~~ ㅎㅎ"라고 했던 날은 적재되어 있는 일들을 쳐내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드는 괴로움,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자꾸 누군가 농담으로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대한 섭섭함, 일이 많은 건가 능력이 부족한 건가 하는 고민 속에서 답을 내리지 못하며 자꾸만 드는 자괴감 등을 혼자 삭혀내고 있던 날이었다.
카페에 노트북이 든 가방을 들고 카페 안 여기저기를 기웃댈 때 눈이 마주친 남자분이 "저 벽 쪽에 콘센트 자리 남아 있어요"라고 했던 날은 마무리하지 못한 일 속에서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들을 주워 담으며 카페 2곳을 들렀다 나온 상태였다.
그런 날에 마주치는 친절들은 비 내리는 어느 날, 모두가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는데 나 혼자 우산이 없는 상황에서 그냥 누군가 툭, 우산을 씌워주는 것만 같다. 그래서 사실은 일기장에 적어두지 않았으면 까맣게 잊어버렸을 그 친절들이 마음 한편 고이 남아 아직도 이렇게 울림을 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이란 어차피 아주 유한하고 아주 이기적이며 아주 연약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솔직히 세상이 이만큼 굴러가는 것도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런 친절들을 마주하면 그래도 인간이란 존재는 약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기도 하고 약간은 연대할 줄 알며 약간은 강하기도 하다는 것을 엿본다. 그래서 적어놓지 않으면 놓치는 이 작은 친절들이 '혁신'을 만들진 못하겠지만 누군가의 하루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가 결국 세상을 굴러가게 하며 바꾸는 원동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친절을 강요하는 건 아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아는' 세상에서 친절은 베풀면 베풀수록 손해일 수도 있다. 친절은 의무가 아니므로 호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내게 그런 변화를 준 친절과, 말과, 사람에게 고맙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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