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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쩨리 Jun 01. 2020

감각 그 자체를 말하다

<아이 엠 러브> 영화 후기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은 영화마다 완벽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가 등장하는 배우는 영화도 영화지만 그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보는 맛도 있죠. 한 800여개의 영화가 있는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에서 이번 주 영화로 <아이 엠 러브(I am Love)>를 고른 것도 순전히 그 때문입니다.


그 전에 한번도 이 영화에 관련해서 찾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정보가 없었고, 나의 관점으로 진짜 영화를 즐기려면 정보를 미리 찾아보지 않고(특히 시퀀스, 의미에 대해 설명한 것들) 보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찾지 않고 영화를 켰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보고 나서 영화에 대해 사전 정보를 찾지 않은 것이 신의 한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보고 나시면 여러분도 그런 생각이 들거에요.




감각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이 영화를 하나의 '오페라'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최근 <오페라의 유령> 영화를 다시 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가히 하나의 완벽한 오페라, 예술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은유로 차있는 그 장면 하나하나, 그리고 그 장면들을 완벽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는 사운드 트랙, 거기에 화룡점정을 찍는 틸다 스윈튼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는 VR기계 같은 건 필요 없이 영화 속으로 우리를 빨아들입니다.


영화는 밀라노 '레키'가문의 모임에서 시작합니다. 이 모임에서 주인공 엠마의 시아버지가 가문의 후계자를 발표하게 되고, 이 발표로 최소한 겉으로는 평화로웠던 재벌 가문의 모습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 모임을 통해 엠마는 후계자로 지목된 그의 아들 에두아르도의 친구 안토니오를 알게 됩니다.


그동안 재벌 레키 가문의 며느리로서, 탄크레디의 아내로서, 에두아르도의 엄마로서만 지루한 삶을 살아오던 엠마에게 안토니오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마치 이상한 나라로 앨리스를 인도하는 시계 토끼처럼 안토니오는 엠마로 하여금 엠마의 고향인 러시아를 다시 생각나게 하고, 감각의 세계로 엠마를 인도합니다. 엠마가 안토니오의 요리를 먹으면서 미각을 되찾은 장금이처럼 새우를 음미하는 장면이나, 그가 안토니오의 밭에서 햇살과 바람을 온전히 느끼는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엠마가 안토니오를 통해 생(生)의 생생함을 느끼게 되는 그 장면들은 우리에게도 그 감각의 생생함을 전달합니다. 새우 요리를 맛보는 장면이나, 나에게 진짜로 내리쬐는 듯한 찬란한 햇빛, 바로 코앞에서 풀 냄새가 날 것 같이 생생하게 담아낸 풀밭, 내 머리도 적시는 듯한 비 등 은유적으로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생함은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나면 시각 뿐만 아니라 청각과 후각에도 영화의 맛이 은은하게 남아 있는 기분이 듭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싶은 많은 이유 중 하나 입니다.




공간 활용의 극치


이 영화를 극찬하는 많은 이유 중 또다른 하나는 바로 뛰어난 공간 활용입니다. 레키 가문의 집은 재벌가문답게 으리으리한 대저택입니다. 가족 모임일 뿐이었던 날에 대체 일하는 사람이 몇 명이었게요?


그러나 영화에서는 재키 가문의 저택 전체가 좀처럼 드러나진 않습니다. 우리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다이닝룸 테이블이나 큰 그림들, 사람이 한꺼번에 10명은 가로로 지날 수 있을 것 같은 대문 등 일부분만을 통해 그 저택의 크기를 짐작할 뿐입니다. 대신 저택 속 닫힌 창문, 내려져 있는 커튼, 반만 열려있는 문 등으로 엠마뿐만 아니라 가족을 속박하는 재키 가문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키 가문에서 해방되어 그 저택을 뛰쳐나가는 엠마의 모습을 그리는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그 저택의 문을 모두 열어놓습니다. 거실에서 그의 딸과 마주친 이후 엠마 그 저택을 뛰쳐나가는 모습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더라도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그가 해방되었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리고 그것은 달려나가는 모습 그 자체보다 훨씬 더 극적으로 해방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합니다. 


마지막 시퀀스는 그런 은유와 틸다 스윈튼의 그 완벽한 연기로 우리에게 최고의 장면을 선사합니다. 그 마지막 시퀀스만으로도 이 영화를 별 5개를 받기에 충분합니다. 앞의 장면들은 사실 이 마지막 시퀀스를 위한 디딤돌에 불과합니다. 영화 내내 차분하고 아름다은 원피스만 입던 엠마가 츄리닝으로 갈아 입고 달려 가장 솔직한 사랑을 고백했던 그의 딸과 무언의 대화를 주고 받은 후, 활짝 열린 대문을 비춰주는 그 시퀀스는 제 영화 인생 탑5 시퀀스에 들어갑니다.


거기에다 영화 내내 완벽하게 들어맞던 존 아담스의 음악은 이 마지막 시퀀스에서 폭발합니다. 완벽한 연출, 풍부한 음악,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연기로 <아이 엠 러브>의 마지막 시퀀스는 우리에게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왜 하필 안토니오와...

영화를 보면 왜 엠마가 안토니오에게 끌리는지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안토니오가 엠마를 초대한 이탈리아의 휴양 지 산레모에는 러시아 정교회가 있고, 안토니오가 처음 엠마에게 맛 보여준 요리는 러시아식 샐러드였습니다. 또 그동안 키 가문 이름 아래 자아를 잃고 살아왔던 엠마가 보기에 안토니오는 자아가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이었고, 그것 또한 엠마를 안토니오로 이끌었던 또다른 하나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엠마가 안토니오와 사랑에 빠진 것은 이해가 되지만, 꼭 그런 형태여야만 했나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또 그것이 가장 감독이 원하는 걸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방법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이 엠 러브>를 보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는 후기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슬픔이라고 할 수도 없고, 기쁨이라고 할 수도 없고, 감동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감정일 것입니다. 그 눈물은 엠마가 느낀 카타르시 그 자체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본 건 아니지만, 화려한 CG나 액션, 자극적인 장면이 아닌 단순히 감각적인 장면으로 청각과 시각을 이렇게 완벽하게 사로잡았던 영화는 거의 유일한 것 같습니다. 감각 그 자체였던 수많은 장면들 덕분에 우리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주인공과 똑같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아이 엠 러브>의 여운은 본 지 이틀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상영관에 걸려있을 때 보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네요. <아이 엠 러브>를 보고 나면 정말 완벽한 예술작품 하나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거에요. 사실 틸다 스윈튼의 이탈리어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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