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을 위해
※ 스포 주의
미루고 미루던 <언노운 걸>을 봤다. 2016년 개봉한 이 영화는 제목부터 이미 "야, 나 좀 뭐 좀 얘기할라고"라고 외치고 있다. 그동안의 바르덴 형제 영화 리스트(<내일을 위한 시간>, <자전거 탄 소년>)를 보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 제니는 의사다. 그동안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사회 주류층이 아니라 사회의 하층민 혹은 주변부 계급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언노운 걸> 주인공 직업이 좀 의아하게 느껴진다. 실제 의사라는 직업이 반드시 그렇다고 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의사는 대부분의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 사회의 하층민이나 주변부 계급으로 그려지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노운 걸> 속 제니는 '다르덴 형제다운' 의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프랑스 리에주 세랭 지역 작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다. 환자들은 대부분 사회 복지 제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거나 노인,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유색인이다. 영화 내내 똑같은 코트를 입으며, 밤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하고 나서도 환자의 전화를 받아야 한다. 게다가 조건이 좋은 센터로 옮길 수 있는 기회도 거절함으로써 다르덴 형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캐릭터로 세팅한다.
영화의 시작은 제니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벨을 거절하면서 시작된다. 이미 진료 시간이 2시간이 지났고, 다 받아주면 환자에 휘둘린다며 제니는 한 번의 벨소리를 무시한다. 그리고 다음날 경찰이 찾아와 그 벨을 눌렀던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전날 저녁 누군지 인지 확인조차 안 했던 제니는 경찰과 CCTV를 돌려보면서 그제야 '누군가'의 정체를 확인하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죄책감을 느낀다. 그냥 벨소리였다. 심지어 집요하지도 않았다. 그냥 누군가 실수로 눌렀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스쳐 지나가는 듯한 벨소리.
그때부터 제니는 정체를 몰랐던 소녀의 정체를 찾아내려고 한다. 마치 소녀의 장례식을 치러주듯, 그는 위협해도, 비협조적인 주변인들의 태도에도 포기하지 않고 소녀의 정체를 찾아나간다. 그것은 속죄의 과정이자 소녀의 장례식이다. 그가 느낀 죄책감을 그렇게 씻어 나간다. 소녀의 정체를 묻는 그가 불편하다며 주치의를 바꾸려고 해도, 경찰조차 그에게 방해된다고 말해도, 계속 소녀의 정체를 찾으면 해코지할 거라는 위협 해도 지지 않고 그는 소녀의 정체를 찾아간다.
그 속죄의 과정 끝에는 소녀를 '제대로' 묻어주는 것이 있다. 진짜 장례식을 하듯, 연고자가 없어 공동묘지에 임시로 묻혀 있던 소녀를 제대로 묻어주고자 한다. 그래서 소녀의 정체를 찾는 그의 과정이 장례식의 과정이다. 소녀의 장례식이자 제니가 가진 죄책감의 장례식이다.
마침내 소녀의 '정체'를 알게 되고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자체가 제니의 속죄를 위한 과정이자 소녀에 대한 장례식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끝난 것이 허무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완결성을 준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것은 제니 주변 인물들의 태도이다. 제니는 소녀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누가 소녀를 아는지도 모르고, 누가 소녀를 봤는지도 모른다. 제나가 처음에 아는 것은 소녀의 얼굴과, 소녀가 죽기 전 절박한 얼굴로 그의 병원 벨을 눌렀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저 경찰에게 소녀가 발견된 곳을 물어보고, 환자에게 수소문하고, 소녀가 방문한 전화 카페를 가본다.
그런데 소녀를 목격했던 사람들은 한 번에 제니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처음에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굴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와 제니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소녀를 보았노라, 소녀에게 내가 시켰노라, 소녀를 알고 있었노라 말한다. 그런 인물들이 한 번에 제니에게 털어놓지 않은 것도 그들의 죄책감 때문이고, 다시 제니에게 사실대로 얘기하는 것도 그들의 죄책감 때문이다.
브라이언은 소녀를 '훔쳐보았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캠프 주인의 아버지는 소녀와 성매매를 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전화 카페의 남자들은 소녀에게 성매매를 시켰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소녀가 강둑으로 넘어져 쓰러진 것을 보고도 모른 척했던 남자는 그가 소녀에게 성매매를 강요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녀의 진짜 정체를 알고 심지어 소녀의 언니였던 전화 카페 직원은 자신이 소녀에게 질투를 느끼고 사라진 날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처음에 제니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는다.
그런 그들의 죄책감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제니에게 결국 털어놓았다는 사실은 공통되지만 누군가는 아예 거짓말을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일부만 거짓을 말하고, 누군가는 적반하장으로 위협을 하고, 누군가는 자살 기도를 했다. 스스로 사실을 말한 사람도 있지만, 제니가 캐내서 알아낸 경우도 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걸 거부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걸 거부한다
뤽 다르덴은 "아무것도 안 하는 걸 거부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걸 거부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화 속 제니는 그런 뤽 다르덴의 말을 그대로 표현하는 인물이다. 위에 나열한 것 같은 비협조적인 주변 목격자들에도 불구하고 계속 소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행동하고 소녀를 꼭 정식으로 매장해줘야 말한다.
이런 제니의 모습은 사실 '언노운'에게 하기는 힘든 행동이다. '언노운'은 그가 전날 밤 가볍게 넘겼던 그 벨소리처럼 그저 타인이고 모르는 세계다. 그러나 CCTV를 통해 소녀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소녀는 더 이상 '언노운 걸'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제니가 끝까지 소녀의 정체를 찾고, 제대로 매장해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보통은 하기 힘들다. 그래서 영화 속 제니의 모습은 다르덴 형제가 결국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캐릭터로 보여준 것이 아닐까.
살아가면서 제니가 그날 밤 벨소리를 그냥 넘겼듯이 우리도 무수히 많은 '언노운'들의 벨소리를 넘긴다. 왜냐면 '언노운'의 벨소리니까. 무엇을 원하지는조차 알 수 없는 벨소리니까. 그리고 제니처럼 문득 '언노운'의 정체를 알게 되기도 하고, 우리가 무시한 벨소리의 결과를 알게 되는 순간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누군가가 될 수도 있고, 가끔 뉴스에서 나오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걸 무시한다고 해서 그건 나쁜 것도 아니고 윤리나 도덕을 어기는 것도 아니고 절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바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을 보고 나면 아주 잠깐 내가 무시한 벨소리들을 생각하게 된다.
나 혼자 먹고살고 내 가족 챙기기도 정신없고 바쁜 세상에 제니처럼 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바르덴 형제가 <언노운 걸>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사람들이 제니처럼 행동하기를 바랐다기보다는 그런 극적인 캐릭터를 보여줌으로써, 아주 잠깐 사람들이 그동안 무시했던 벨소리들을 생각하고 제니가 소녀의 장례를 치러주듯 정체를 밝힌 것처럼 '장례식'이라도 생각으로 치러주길 바랬던 게 아닐까 싶다.
인류는 언제나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산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0.0001 나노미터라고 하더라도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세상보다 우리 부모님이 살았던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고 우리 부모님들의 세상보다 조금 더 나아진 세상에 살고 있고, 내 다음 세대에게는 내가 살던 세상보다 더 나아진 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제니처럼 '누군가'의 벨소리를 무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을 생각하는 순간들과 그런 사람들의 힘이 모이고 쌓여 변화를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술이 좋아지고 살기 더 편해진 그런 세상이 아니라 혐오와 차별, 무관심에서 조금 더 나아진 세상 말이다.